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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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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내가 고향 땅을 마지막으로 탈출한 날이다. 두 번의 강제 북송으로 인해 도집결소의 노역과 보안서 구류장 생활을 거치며, 무려 4년 동안 갖은 시련과 고통을 온몸으로 겪었다. 그리고 나는 네 번의 탈북을 강행했다. 물론 이번에도 성공을 담보할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더 이상 탈출하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사실뿐이었다. 장난삼아 시작했던 탈북은, 어느새 살아남기 위한 생사를 건 탈북이 되어 있었다. 세 번째 탈북으로 두만강을 무사히 건넜지만, 내 몸은 이미 도집결소와 구류장 생활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중국 땅에 도착했지만, 언제 어디서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그곳은 더 이상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한국으로 가고 싶었지만, 나에게는 브로커와 연결될 선이 없었다. 그때 한국에 있는 한 탈북 여성이 중국 현지인에게 자신의 동생 가족을 데려다 달라고 부탁해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중국의 한 조선족이 그 부탁을 들어주면 나까지 함께 한국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 갔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이 길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설령 속임수라 해도 이대로 중국 땅을 떠돌다 잡혀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번 더 목숨을 걸어보자는 생각뿐이었다. “가겠습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말 속에는 내 남은 삶 전부를 내거는 각오가 담겨 있었다. 그렇게 나는 네 번째 탈북길에 오르게 되었다. 돌아갈 수 없는 길, 살아야만 의미가 있는 길 위에. 나는 그렇게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고향 땅을 향해 다시 발길을 돌렸다. 형제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옷과 신발을 챙기고, 조카들에게 줄 사탕과자도 빠짐없이 담았다. 꼭 필요한 휴대전화와 돈은 들키지 않도록 깊숙한 곳에 숨겨 넣었다. 그러다 보니 짐은 어느새 30킬로는 족히 되어 보였다. 처음에는 그다지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배낭은 어깨를 짓누르고 발걸음은 점점 더뎌졌으며 기운도 빠져나갔다. 거의 삼백 리 길이었다. 괜히 짐을 이렇게 많이 지고 떠났다는 후회가 몇 번이나 밀려왔다. 그러나 형제들에게 도움이 되고, 외국제 사탕과자를 받아 들고 좋아할 조카들의 얼굴을 떠올리자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길을 다그쳤다. 그렇게 저녁 무렵까지 네 시간가량을 걸어 두만강에 도착했다. 12월 18일 밤, 둥근 달은 유난히 밝았다. 잠시 짐을 내려놓고 고향 쪽 두만강 기슭을 유심히 살폈다. 나는 바지 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차디찬 두만강 물에 발을 담갔다. 순간 냉기가 온몸을 파고들며 전율이 일었다. 무거운 배낭을 등에 진 채, 나는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불과 3~4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너무 긴장한 탓에 심장 박동 소리가 귀에서 ‘쿵당, 쿵당’ 울려 퍼졌다. 강 기슭으로 올라오자 양말에서는 물이 줄줄 흘러내렸고 주먹만 한 돌멩이들이 떡떡 달라붙어 있었다. 신발을 신을 새도 없이 조심스럽게 숲 쪽으로 접근했는데, 숲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오솔길에 국경 경비대원 하나가 웅크린 채 총을 품에 안고 잠들어 있었다. 나는 한 손에 돌멩이를 쥐고 다른 한 손에는 신발을 들었다. 경비대원을 똑바로 주시하며 그의 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돌멩이로 내리치고 총을 빼앗아 너 죽고 나 죽자는 각오였다. 불과 십 초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숨이 막혀 시간이 멈춘 듯 느껴졌다. 그가 살 팔자인지 내가 운이 좋았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경비대원은 끝내 눈을 뜨지 않았고 나는 무사히 길을 건너 산으로 올라붙을 수 있었다. 긴장이 풀리자 그제야 온몸이 얼어붙은 듯 굳어버렸고 기진맥진해 더는 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커다란 소나무 아래에서 멈췄다. 멧돼지 잠자리로 보이는 곳이었는데 눈으로 덮인 산속에서 그 자리만은 이상하게도 아늑했고 눈이 없었다. 얼어붙은 몸을 억지로 움직여 마른 삭정이들을 모아 모닥불을 피웠다. 소가죽처럼 굳어버린 바지와 속내의를 벗어 던지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불이 사그라들고 짐불만 남으면 그것을 한쪽으로 밀어내고 다시 모닥불을 피웠다. 그리고 짐불을 밀어낸 자리에 가랑잎을 깔고 배낭을 끌어안은 채 잠시 눈을 붙였다. 그렇게 나는 열여덟 시간을 걸어 마침내 누나 집에 도착했다. 이틀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잠만 잤다. 이후 부탁받았던 그녀의 집을 찾아가 그들과 며칠 뒤 떠나기로 약속을 잡은 후 다시 누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나는 다시는 이 땅을 밟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진첩을 펼쳐 들었다. 될 수 있는 대로 온 가족이 함께 나온 사진과 친척들의 사진을 골라 챙겼다. 그리고 누나와 매형에게 부탁했다. 훗날 나와 연락이 닿아 전화가 오게 되면 사실 확인을 위해 내가 왜 사진을 가져갔는지 그 사연을 그대로 이야기해 달라고. 고향에서의 마지막 밤은 누나 집이 아니라 함께 데리고 떠나야 할 그녀의 집에서 보내기로 했다. 남들이 보지 않는 이른 새벽에 떠나야 했기에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12월 28일 밤, 나는 그녀의 집에 있었다. 머릿속은 몹시 복잡했다. 오는 길이 너무도 고되고 험했기에 열 살, 열두 살의 어린아이들을 바라보자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과연 저 아이들이 삼백 리 길을 걸어낼 수 있을까. 가다 힘들다고 울며 보채면 어쩌나. 그런 생각에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 작은아이는 다음에 데려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그러나 그녀의 결심은 단호했다. 아이들을 두고는 갈 수 없다며, 그렇다면 아예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 그때 작은아이가 자기를 두고 갈까 봐 겁이 났는지 냉큼 내 무릎 위에 올라앉아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치 *“나를 버리지 말아주세요”*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순간, 나도 마음을 정했다. 에라, 모르겠다. 다 데리고 떠나자. 이왕 목숨을 건 선택이라면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는 배짱이 생겼다. 저녁을 먹은 뒤에도 잠은 오지 않았다. 나는 추운 겨울밤 밖으로 나가 애꿎은 담배만 연거푸 빨아댔다. 고양이 담배 세 갑을 챙겨왔는데 그녀의 아버지께 한 갑을 드리고 두 갑은 중국에 도착할 때까지 피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벌써 한 갑을 다 피워버렸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그녀의 어머니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아, 내 딸도 고생하며 살았고 자네도 고생이 많았는데 남조선에 가서 함께 살면 안 되겠나? 그러면 나는 죽어도 눈 감고 죽을 수 있을 것 같네.” 어둠 속에서 바라본 병색이 깊은 그녀 어머니의 얼굴에는 간절함이 역력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어 그저 “생각해 보겠습니다”라는 말만 남겼다. 윗방으로 올라가 보니 그녀의 아버지 역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내가 드린 담배를 입에 문 채 잠든 손주들과 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몇 시간 뒤면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잠들지 못하게 하는 듯했다. 나는 먼 길을 떠나야 했기에 잠시라도 눈을 붙이려 애썼지만 오지 않는 잠 속에서 그저 뒤척이기만 했다. 동틀 무렵,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시간에 그녀의 언니 가족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모두 말없이 일어나 앉았고 그녀와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부엌에서 아침밥을 지었다. 잠시 후, 침묵을 깨듯 “밥상 놓아라”라는 말이 나왔다. 다시는 함께할 수 없는 마지막 아침 식사였다. 흰쌀밥에 두부국, 김치와 감자 반찬.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영원한 이별의 밥상이었다. 나는 밤에 들었던 어머니의 말이 떠올라 마음을 조금이나마 놓아드리고 싶어 술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술을 드시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는 술을 올리고 싶었다. 그녀가 술 한 병을 내왔고 나는 잔을 모두의 앞에 놓았다. 그리고 각 잔에 술을 조금씩 따랐다. “어머니, 이걸 저희들의 약혼식으로 합시다. 넷째 사위의 술 한 잔 받아주십시오.” 희미한 등잔불 아래에서도 나는 그녀 어머니의 눈가에 고이는 눈물을 보았다.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했지만 그녀 어머니만은 조용히 말했다. “이 사람… 고맙네.” 그렇게 이별은 희미한 등잔불 아래에서 시작되었다. 말없이 눈물을 삼키는 이별이자 약혼식이었다. 동이 트기 전, 길을 떠나야 했기에 감상에 젖을 틈도 없이 우리는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아버지, 어머니, 안녕히 계십시오.” 그 말조차 하지 못한 채 서로의 손만 꼭 잡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래… 조심히 가라.” 그 말도 눈물에 잠겨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한 손은 배웅을 하고 다른 한 손은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2010년 12월 29일. 동트기 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 가정의 비극적인 이별 한 장면이 아무 소리 없이 역사의 뒤편으로 덮여버렸다. 그녀의 언니는 말없이 자전거를 끌고 산 밑까지 우리를 바래다주기 위해 따라섰다. 철다리를 건너는 동안 그녀의 아버지는 칼로 살을 에는 듯한 추운 새벽 공기 속에서도 우리 일행이 자그마한 점으로 보일 때까지 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우리의 뒷모습을 영원히 잊지 않으려는 듯 얼어붙는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떠나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니, 이것이 영원한 이별일지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모든 아픔을 가슴에 묻고 말없이 서 있던 내 고향의 부모님들, 그 강인한 모습을 나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셋째 언니는 나보다 한 살 위였고 함께 떠나는 그녀는 나보다 한 살 아래였다. 두만강으로 곧장 이어지는 산 밑에 다다를 때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걸었다. 아마 말로 하지 못한 대화는 서로의 마음속에서 이미 수없이 오갔을 것이다. 산 밑에 이르러서야 그녀가 침묵을 깨뜨렸다. “언니, 이제는 내려가오.” 그제야 2010년 12월 29일 아침이 어둠을 밀어내며 밝아오기 시작했다. 나도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람들 눈 뜨기 전에 얼른 내려가오. 우린 이제 산길이라 그나마 안전할 거요.” 그녀의 언니는 말없이 조카들을 하나하나 꼭 끌어안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가에도 눈물이 맺혀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먼 산을 바라보며 북받치는 감정을 눌러 담고 말했다. “빨리 내려가오. 사람들 오기 전에…” 그리고 아이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큰엄마께 인사하고 우린 빨리 가자.” 내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고 다시 산속 길을 따라 걸었다. 이제부터 이 가족의 운명은 나에게 달려 있었다. 아니, 하늘에 달려 있었다. 걸음을 옮기며 거리와 시간을 가늠해 보니 아무래도 계산이 맞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 날이 밝기 전에 떠났고 산길로 천천히 가도 오전 열 시면 도착할 거리였다. 그다음은 두만강. 하지만 대낮이었다. 혼자라면 충분히 넘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와 아이 둘. 과연 무사히 강을 넘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에 잠긴 채 갈림길에서 나는 무심코 길을 잘못 들었다. 한참을 가다 보니 점점 낯선 산발과 산등성이였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동서남북을 가늠했다. “길을 잃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다시 방향을 잡아 길 아닌 길을 걸었다. 산속에서 세 시간가량 헤맨 끝에 눈에 익은 길을 찾았을 즈음, 이미 목적지 부근이었다. 그런데도 오후 두 시가 채 되지 않았다. 나는 두만강이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에 앉아 잠시 쉬어 가자고 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두만강을 바라보았다. “저기가 두만강이오. 저 산기슭 아래 큰 집이 국경경비대 중대병실이오. 그리고 우리는 저길 건너 약 600미터의 두부콩밭, 허허벌판을 지나야 하오.” 시간은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은 애매한 시각이었다. 점심시간에 맞춰 넘어야 했는데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타이밍이 어긋난 것이다. 내 말을 듣는 그녀 가족의 눈빛에는 긴장과 공포가 서려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의 선택 하나에 이 가족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것을. 나는 태연한 얼굴로 고향 담배 ‘고양이’를 꺼내 물었다. 연기를 깊이 들이켰다 내쉬며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아버지, 제게 세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습니다. 혼자 넘나들던 이 두만강이 오늘은 왜 이렇게 두렵습니까. 중대병실 앞은 어떻게 지나고 저 허허벌판은 어떻게 건너란 말입니까. 정말 아버지가 계시다면 오늘 저에게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평생 아버지를 믿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태어나 처음 내 스스로 기도를 드렸다. 맑은 하늘이 그날따라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다. 연달아 담배를 피워 물며 신경질적으로 꽁초를 짓이겼다. 그녀의 가족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왔다. 말을 걸까 봐 숨이 막혔지만 그들은 우리를 무심히 지나쳤다. 누가 봐도 이 고장의 한 가족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내 기도에 응답이라도 한 듯 그 맑던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워지더니 부슬부슬 진눈깨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내 사방이 어두워지고 진눈깨비는 싸락눈으로, 싸락눈은 손바닥만 한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정말 일하기 싫은 날씨, 창밖도 보기 싫은 을씨년스러운 날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말했다. “지금이다. 빨리 내려가자.” 아이들을 앞에 세우고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일렬로 산 오솔길을 따라 중대병실 앞을 무사히 지나 큰길에 들어섰다. 그 순간, 위쪽에서는 국경경비대 소대가 군가를 부르며 내려오고 있었고 아래쪽에서는 순찰병 둘이 올라오고 있었다. 진퇴양난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낮게 말했다. “윗쪽으로 맞받아 가자. 말 걸면 친척 집 간다고 해라.” 그때였다. 눈은 더욱 굵어져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졌다. 나는 소리쳤다. “젖먹던 힘까지 다해 달려라! 절대로 손 놓지 마라!” 큰아이 손을 잡고, 큰아이는 작은아이 손을, 작은아이는 엄마 손을 잡고 우리는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눈이 얼굴에 부딪혀 아팠지만 그걸 느낄 겨를도 없었다. 우리가 남긴 발자국은 눈에 의해 곧바로 지워졌다. 숨이 턱에 닿아 멈춰 섰을 때 우리는 이미 허허벌판 끝, 두만강 절벽 앞에 서 있었다. 그때 눈이 그치고 구름이 걷히며 해가 비쳤다. 길 위의 군인들, 자동차들, 행인들 모두 마치 눈사람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서 있는 이곳만 거짓말처럼 눈이 하나도 없었다. 잠시 숨을 고른 뒤 나는 절벽 사이 통로를 따라 두만강 기슭으로 내려섰다. 해는 다시 구름 뒤로 숨고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두만강은 바삭한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나는 그녀와 아이들에게 기도하고 건너자고 말했다.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 아버지,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이 강을 건넙니다. 앞에 놓인 모든 위험 속에서도 우리의 걸음을 지켜주옵소서. “아멘.” 아이들과 그녀가 함께 아멘을 외쳤다. 나는 두만강 얼음 위에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얼음이 ‘쩍’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강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나는 즉시 엎드렸다. 그리고 기어서 건너자고 말하려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와 아이들 모두 이미 나를 따라 엎드려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기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멈추면 그들도 멈췄고 내가 움직이면 그들도 움직였다. 그 모습에 나는 순간 웃음이 나왔다. 군사훈련에서도 이렇게 하나가 되긴 힘들 텐데. 강기슭에 도착하자 나는 아이들을 재촉했다. “길 위로 올라서자마자 뒤돌아보지 말고 산으로 뛰어라.” 큰아이가 발을 디디는 순간 돌이 굴러 내려 내 발등을 찍었지만 아픔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차 불빛이 스쳤다. 우리는 모두 도로 옆에 납작 엎드렸다. 차가 지나가자 곧바로 길 위로 올라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렇게 2010년 12월 29일 저녁 7시경, 나는 마침내 내 고향 땅을 탈출했다. 깊은 산속에 몸을 숨긴 뒤 나는 눈을 밀어내고 마른 삭정이를 모아 불을 피웠다. 역시 동북의 겨울은 혹독했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지만 잠시라도 움직이지 않자 몸은 금세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래서 위험을 감수하고 모닥불을 피웠다. 아이들도 불가에 앉아 몸을 녹이며 잠깐이나마 긴장과 공포를 잊은 듯 해맑게 웃었다. 그때였다. 발끝에서 ‘쿡쿡’ 쑤시는 통증이 밀려왔다. 신발을 벗자 하얀 양말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고 신발 안에는 피가 절벅했다. 오른쪽 엄지발가락과 두 번째 발가락은 찢겨 나가 허연 뼈가 보일 정도였다. 원래는 산속으로 목적지까지 갈 생각이었지만 내 발은 이미 망가졌고 아이들도 하루 종일 걸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주변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달빛에 드리운 산 그림자들은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나는 결심을 바꿔 도로 위로 걷기 시작했다. 멀리서 자동차 불빛이 비치면 숲속으로 몸을 숨겨 차가 지나갈 때까지 엎드려 있었다. 그러다 결국 떠나기 전부터 가장 걱정하던 일이 벌어졌다. 작은아이가 “힘들어, 못 가겠어”라며 도로 한가운데 드러누운 것이다. 큰아이는 아무 말 없이 배낭을 메고 터벅터벅 앞장서 잘 걸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와 내가 번갈아 아이를 업고 한 걸음, 한 걸음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무려 스물다섯 시간을 걸어 나는 마침내 출발지였던 조선족 아지트에 도착했다. 멀리서 개들이 꼬리를 흔들며 짖었다. 한 달 동안 치료하며 지낼 때 가장 정이 들었던 개들이었다. 아지트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발을 대충 치료하고 브로커와 전화 통화를 했다. 이어 의뢰인과 통화하고 가족 확인을 위해 영상 통화까지 시켰다. 나는 목숨 걸고 데려온 대가로 인민폐 3만 위안을 받으면 다시 고향으로 들어가 형제들에게 나눠주고 내가 좋아하던 여자를 데리고 다시 한국으로 올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런데 브로커는 “당장 출발하라”고 재촉했다. 나는 말했다. “너희는 먼저 가라. 한국에서 만나자. 나는 다시 고향에 들어가 사람을 데리고 뒤따라 가겠다.” 그리고 조선족에게 단단히 말했다. “내 약혼녀다. 절대 딴생각 하지 마라.” 나는 이미 여자들이 어떻게 팔려가는지 직접 목격한 적이 있었다. 내가 데려온 사람만큼은 건드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출발 전에 약혼식이라 하고 떠났으니 약혼녀라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브로커의 행동이 이상해졌다. 자주 밖으로 나가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내가 묻자 브로커는 이렇게 말했다. “당장 출발하라는데 입은 옷과 신발이 문제라 새 옷을 사 입혀 보내라고 하더라.” 나는 가족들에게 먼저 출발하라고 했지만 그들은 같이 가겠다고 했다. 브로커 눈치가 이상하다는 것이다. 나 역시 지칠 대로 지친 상태라 “그러면 그렇게 하자”고 했다. 대신 브로커에게 돈은 언제 주느냐고 물었다. “아침 먹고 얘기하자”고 했다. 아침을 먹은 뒤 그녀는 설거지를 하고 나는 속내의에 동복만 걸친 채 신발을 꺾어 신고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왔다. 브로커는 자기가 치는 벌통 쪽으로 가 한족말로 누군가와 열심히 통화를 하고 있었다. 손짓, 몸짓까지 섞어가며. 나는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며 그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중국 변방대 한 개 소대가 아침에 우리가 들어온 발자국을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평균 키 180cm는 될 십대, 이십대 변방대원들이 무려 18~20명. 소방목 울타리로 친 쇠그물을 헤치며 불과 100미터 안팎까지 다가와 있었다. 나는 집 안을 향해 소리쳤다. “중국 공안이다! 빨리 뛰어라!” 그리고 곧장 뒷산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2010년 12월 30일 오전 10시 30분.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화룡 변방대의 기습을 받게 되었다. 뒷산 언덕을 향해 달리며, 나는 그녀의 가족을 챙기느라 꺾어 신었던 신발을 제대로 다시 신고 소리쳤다. “빨리 산에 붙어!”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정신없이 달렸다. 달리는 건지 기어가는 건지 분간조차 되지 않았다. 전날 밤의 피로도 풀지 못한 채 달리자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 “아이들은 잡혀도 괜찮다. 너만은 절대 잡히면 안 된다.” 산비탈을 넘어, 잣나무 숲으로 이어진 자그마한 경사길을 향해 달리는 나는 그저 괴물 하나였을 것이다. 잠시 멎었던 발의 상처에서 다시 피가 쏟아졌다. 신발 안에서 넘친 피가 눈 위에 붉은 자국을 남기며 이어졌다. 그때였다. 뒤에서 “엄마, 엄마, 살려줘!” 작은아이의 비명과 울음이 산을 갈랐다. 정신없이 달리던 우리 둘은 동시에 멈춰 뒤돌아보았다. 백여 미터 남짓한 거리에서 건장한 군인 다섯이 작은아이를 안고 있었다. 수갑을 채우려 하자 아이는 살려달라며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 한편 큰아이는 달랐다. 아무 말 없이 숨어 있다가 침착하게 옷과 신발을 챙겨 신고 다른 방향으로 달렸다. 그러나 곧 발각되어 세 명의 군인이 그의 뒤를 쫓았다. 나머지 인원은 집과 헛간, 낟알 더미, 소외양간까지 샅샅이 수색하고 있었다. 작은아이의 비명에 걸음을 멈춘 그녀는 내게 말했다. “혼자 가요.” 자기는 자식을 두고 혼자 갈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소리쳤다. “아이들은 잡혀도 괜찮아. 어른이 같이 잡히면 안 돼!” 그러나 그녀는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를 뒤로한 채 군인들을 향해 걸어갔다. 네 명의 군인이 다가와 두 명은 그녀의 팔목에 수갑을 채웠고, 나머지 두 명은 나를 향해 손짓하며 추격을 시작했다. 그 짧은 순간에도 나는 보았다. 어머니라는 존재가 얼마나 강하고 위대한지를. 나는 잣나무 숲으로 몸을 던졌다. 나무 그루터기에 피 흘리는 발을 올려 흔적을 지우고, 곧바로 잣나무를 타기 시작했다. 빼곡히 심어진 잣나무 사이, 가지를 붙잡고 나무에서 나무로 옮겨 다녔다. 다섯 그루쯤을 넘긴 뒤 힘이 빠져 잠시 멈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를 에워싼 군인들이 “두 명은 잡았으니 돌아가자”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두 명의 군인이 내 발자국을 따라오다 흔적이 끊기자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결국 내가 올라탄 나무 아래에 멈춰 섰다. 그들이 고개만 들면 나는 끝이었다. 세 번째 북송은 곧 사형이었다. 나는 늘 몸에 칼을 지니고 다녔다. 체포되면 그냥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품고 다닌 단도였다. 칼자루를 꽉 쥐었다. 그들이 나를 발견하면 뛰어내려 찌르고, 총을 빼앗는 장면을 머릿속에서 수없이 그려보았다. 살을 에는 추위였지만 긴장으로 칼을 쥔 손에는 땀이 흘렀다. 아래에서 다시 소리쳤다. “빨리 내려와!” 나무 밑에 있던 군인들이 아래에 대고 “내려간다.” 맞받아 응답하였다. 그들은 나무 아래에서 담배를 붙여 물고 몇 걸음 내려가다 말고 미련이 남은 듯 주변을 다시 살폈다. 그러다 결국 일행과 합류했다. 그녀는 수갑이 채워진 채였고 작은아이는 한 군인의 품에 안긴 채 급경사의 비탈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나에게 닥쳤던 위험은 그렇게 일시적으로 사라졌다. 바람에 흔들리는 잣나무 위에서 나는 붙잡혀 가는 그녀와 아이들을 그저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잡히는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 다급한 상황에서 왜 잡히면 안 되는지 설명할 수도 없었고, 눈앞에서 체포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 앞에 나는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북한에서는 미성년자가 잡히더라도 밖에 보호자가 있으면 바로 풀려난다. 그러나 보호자와 함께 체포되면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감방 생활을 함께해야 한다. 어른만 무사히 빠져나가면 다시 사람을 보내 아이를 탈출시킬 수 있다. 그런데 함께 잡히고 말았다. 그 고통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이미 두 번이나 그곳을 거쳐왔다. 그 고통이 인간에게 얼마나 가혹한지,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 괴로웠다.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나는 나무에서 내려와 커다란 벼랑 아래 쌓인 가랑잎 속에 몸을 맡긴 채 아래를 주시했다. 땀이 식자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속옷 차림에 피에 젖은 신발은 끄득끄득 소리를 내며 얼어붙어 갔다. 아래쪽에서는 군인들이 집합했고, 박 씨 브로커는 그들 앞에서 허리를 깊이 숙이고 있었다. 잠시 뒤 자동차 두 대가 와서 멈췄다. 군인들은 승합차에, 그녀와 아이는 승용차에 태워져 떠나갔다. 나는 떨리는 몸을 간신히 붙잡고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계속 통화 중이었다. 다시 한번 집 주변을 살핀 뒤 나는 급경사의 비탈길을 절뚝거리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집 근처에 거의 다다르자 개가 달려와 꼬리를 흔들며 혀로 내 얼굴을 핥아댔다. 나는 집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머저리라며 스스로를 욕하면서도 녀석의 뒤통수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그때였다. 십여 미터 앞에서 큰아이가 “아버지!” 하고 울부짖으며 나를 향해 달려와 내 품에 안겼다.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도망친 큰아이는 죽기 살기로 달리다 굽인돌이를 이용해 추격하던 변방대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그는 숲속으로 몸을 숨겨 눈이 없는 무성한 덩굴숲에 가랑잎을 덮고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숨을 죽였다. 다행히 추격은 따돌렸지만, 눈앞에서 동생과 엄마가 잡혀가는 장면을 본 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머릿속은 복잡했다. 동생과 엄마는 체포되었고, 함께 온 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낯선 이국땅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차라리 엄마 곁으로 가 함께 체포될까 하는 생각도 스쳤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자신들을 데려온 사람이 붙잡히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에게 마지막 희망이 되었다. ‘그 사람은 나를 찾을 것이다.’ 그 믿음 하나로 그는 엄마와 그 사람이 달아난 방향을 향해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바로 그때, 절뚝거리며 집 쪽으로 돌아오는 그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큰아이는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아버지!” 하고 외치며 그에게 달려갔다. 나는 “아버지” 하고 부르며 달려오는 아이를 안으며 말했다. “너라도 잡히지 않아서 다행이다. 울지 말고, 엄마와 동생을 살려달라고 기도하자.” 그러나 내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 내가 데려온 아이였다. 만약 그들을 구하지 못한다면 나는 한국에 가서라도 이 아이를 아들로 키우겠다고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한편 조선족 브로커는 자신은 잡히지 않아 다행이라며 변방대가 다시 올 수 있으니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는 군인들에게 우리가 속옷 차림에 신발도 못 신고 도망쳤다고 말했다고 했다. 또 그들이 북송되면 죽을 수 있다며 어떻게 방법이 없겠느냐고 장교들에게 물어보았다고도 했다. 그리고 한국에도 체포되었다고 전화를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함께 기도하자고 했다. 그때까지 나는 그의 말이 자작극이라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신발을 신은 채 앉아 그녀와 작은아이를 위해 기도했다. 그러다 갑자기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라 눈물이 쏟아졌다. 2010년 12월 30일, 달이 밝은 밤이었다. 나는 바깥으로 뛰쳐나가 둥근 달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눈물을 흘리며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무엇을 기도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기도를 마치고 일어서려 하니 무릎이 저려 제대로 일어설 수 없었다. 무릎이 닿은 자리의 눈은 녹아 차갑게 얼어 있었다. 그때 길 쪽에서 자동차 불빛이 번쩍였다. 불빛은 우리가 있는 쪽으로 꺾어 들어왔다. 나는 급히 큰아이를 불러 도망치자고 했다. 아이의 손을 잡고 뒷산 언덕으로 달렸다. 개까지 우리를 따라왔다. 집이 보이는 언덕 뒤 큰 나무 아래에 엎드려 집 쪽을 주시했다. 우리가 엎드리자 개도 덩달아 엎드렸다. 잠시 뒤, 그녀를 호송해 갔던 차들이 두 시간 만에 다시 들이닥쳤다. 조선족이 나가 맞았지만 군인들은 그를 무시한 채 집 안팎과 헛간, 외양간, 심지어 낟알더미까지 샅샅이 수색했다. 엎드려 있던 개가 전조등을 향해 짖자 나는 녀석의 뒤통수를 눌러 “조용히 해.” 하고 속삭였다. 개는 잠잠해졌다. 전조등이 여러 번 우리가 있는 쪽을 비췄지만 거리가 있어 그냥 스치고 지나갔다. 결국 군인들은 철수했다. 잠시 후 차가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그녀와 작은아이도 함께 내렸다. 작은아이는 “형님아, 형님아!” 하고 울부짖었다. 장교 하나는 아이에게 계속 소리쳐 부르라 시켰고, 그녀는 동복을 입은 채 산쪽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큰아이가 벌떡 일어나려 하자 나는 그의 목덜미를 눌러 앉히며 “가면 안 돼. 엎드려 있어.” 명령하듯 말했다. 잠시 후 수색하던 군인들에게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차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조선족은 내려오라고 손짓했다. 그는 기도에 응답이 왔다며 기뻐했다. 한 사람당 만 위안을 내면 북송시키지 않고 돌려보내주겠다고 약속받았다는 것이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내가 받을 돈 이만 위안으로 그들부터 살리자고 했다. 그리고 남은 돈 중 일부는 한국으로 갈 여비로 쓰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2010년 12월 30일 밤은 지나갔다. 하지만 나는 한순간도 잠들 수 없었다. 31일 아침, 언제 닥칠지 모를 위기에 대비해 다시 뒷산으로 올랐다. 낮 두 시까지 아무 소식이 없자 조선족에게 전화를 했다. 아직 돈이 입금되지 않아 넘겨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먼저 연길로 가라고 했다. 돈이 들어오면 그녀와 아이를 데리고 뒤따라오겠다고 했다. 믿든 믿지 않든 그 상황에서 선택지는 없었다. 나는 그의 말대로 움직였다. 그렇게 연길에 도착했고, 하나둘씩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사연 많은 탈북자들이 그날 밤, 같은 공간에 모였다.
Table of contents
- 1마지막 발걸음네 번째 탈북, 고향 땅을 뒤로하고 두만강을 건넌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험난한 여정을 시작하며, 중국 땅에 도착하지만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 2약속의 끈한국행을 위해 조선족 동생 가족을 돕기로 한다. 그 대가로 자신도 한국으로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받지만, 불안한 예감이 스친다.
- 3이별의 밤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챙기고 고향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낸다. 누나와의 슬픈 작별 속에서, 사진첩을 챙기며 애틋한 마음을 다잡는다.
- 4두만강의 그림자여성과 두 아이를 데리고 두만강을 건넌다. 국경 경비대를 피해 어둠 속을 헤치지만, 아이들의 어린 모습에 망설임이 커진다.
- 5기적의 눈보라추격대가 닥쳐오지만, 하늘이 내린 눈보라 덕분에 위기를 모면한다.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마침내 탈출에 성공한다.
- 6덫조선족 브로커의 아지트에 도착하지만, 변방대의 기습으로 여성과 아이들이 체포된다. 주인공은 홀로 도망치며 절망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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