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별빛 아래, 너를 만나다

교정의 낡은 벤치, 여름날의 소나기. 김서연은 우연히 마주친 이준호의 모습에 첫눈에 반한다. 그의 웃음소리, 나긋한 목소리, 무엇 하나 놓치고 싶지 않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잦아들고, 오직 준호만이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운다. 도서관 창가에 나란히 앉아 문제를 풀 때, 하굣길 가로등 불빛 아래를 걸을 때, 서연은 처음으로 심장이 터질 듯한 설렘을 느낀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느껴지는 순간, 두 사람의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시작된다. 마치 오래전부터 약속된 운명처럼, 그들은 서로에게 이끌린다. 서연의 일상은 온통 준호로 물들기 시작하고, 그녀의 세계는 오롯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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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 아래, 너를 만나다

교정의 낡은 벤치, 여름날의 소나기가 지나간 자리에는 싱그러운 풀 내음과 흙먼지 냄새가 뒤섞여 묘한 향기를 풍겼다. 눅눅한 공기 속에서 나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빗방울이 맺혔던 나뭇잎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고, 그 빛줄기 사이로 무지개가 희미하게 걸렸다. 그때였다. 익숙한 듯 낯선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이준호.

그는 교정 한가운데 서서, 마치 금방이라도 흩어질 듯한 무지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셔츠 깃은 빗물에 젖어 살짝 들떠 있었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의 얼굴은 묘하게도 빛나고 있었다. 그는 햇살을 등지고 서 있었기에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실루엣만으로도 내 심장은 쿵 하고 내려앉았다. 운명처럼, 처음 본 순간이었다. 아니, 어쩌면 오래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웃음소리, 나긋한 목소리, 무엇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잦아들고, 오직 그만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날 이후, 나의 세계는 온통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쉬는 시간이면 도서관으로 달려가 그의 옆자리를 꿰찼다. 창가 자리, 햇살이 가장 잘 드는 곳. 우리는 나란히 앉아 문제집을 풀었다. 나는 그의 풀이 과정을 힐끔거리며 내 문제집에 답을 베껴 쓰기도 했고, 때로는 그의 어깨에 살짝 기대어 책을 읽기도 했다. 그는 그런 나를 묵묵히 받아주었고, 가끔씩 펜 끝으로 내 머리를 툭툭 건드리며 장난을 쳤다. 그때마다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숙였다.

하굣길도 마찬가지였다. 해가 지고 하나둘씩 가로등 불빛이 켜지면, 우리는 그 불빛 아래를 걸었다.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며 내 그림자와 겹쳐졌다. 우리는 별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점심 메뉴가 뭐였는지, 내일 시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혹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발걸음을 맞추며 묵묵히 걷기도 했다. 그 짧은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의 옆에 있으면 세상 모든 것이 완벽하게 느껴졌다.

“서연아, 오늘 너 또 준호 선배 옆에 앉았더라?”

점심시간, 급식실에서 밥을 먹던 지민이가 툭 던졌다. 그녀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항상 내 곁에서 현실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는, 나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 하지만 나는 이미 준호에게만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응. 오늘따라 문제가 어려워서 옆에 앉아 있으면 도움이 될까 해서.”

나는 억지로 변명하듯 얼버무렸다. 지민이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도움이 될까 해서? 서연아, 너 요즘 준호 선배 생각하느라 공부에 집중도 못 하잖아. 내가 모르는 거 물어보면 제대로 대답도 안 하고.”

지민이의 목소리에 조금의 짜증이 섞여 있었다. 나는 죄책감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준호를 생각하느라 다른 모든 것을 놓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의 눈빛, 그의 목소리, 그의 모든 것이 나를 옭아매고 있었는데.

“아니야, 지민아. 나도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애써 태연한 척 말했지만,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지민이는 한숨을 쉬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정말 너 그러다 나중에 후회한다. 준호 선배는 너한테 관심 없어. 그냥 동생처럼 생각하는 걸 수도 있고.”

“무슨 소리야. 우리 선배랑 잘 맞는다니까.”

나는 발끈하며 대답했다. 지민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씁쓸한 표정으로 밥을 먹을 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침묵이 더 무서웠다. 그녀의 침묵은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의 사랑이 조금은 맹목적이라는 것을. 준호에 대한 나의 마음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집어삼키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어떤 현실적인 문제도, 미래에 대한 고민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준호만이 전부였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했다.

어느 날 오후, 나는 준호를 기다리며 도서관 창가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복잡한 수학 공식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지만, 내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만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툭 건드렸다. 돌아보니 최민준이었다. 그는 같은 반 친구였고, 말수가 적고 조용한 아이였다. 나는 그가 나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희미하게 알고 있었지만, 준호에게 빠져 있는 동안 그의 존재는 나의 시야에서 점점 희미해져 갔다.

“김서연.”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어, 최민준. 무슨 일이야?”

“준호 선배, 지금 매점에서 빵 사러 갔어. 곧 올 거야.”

그는 덤덤하게 말하며 나의 곁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나를 향해 있었지만, 나는 그의 눈빛 속 깊은 곳에 숨겨진 복잡한 감정을 읽어낼 여유가 없었다.

“아, 그래? 고마워.”

나는 그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민준이는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나와 같았지만, 그의 마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언제나 관찰자였다. 내 곁에서, 그러나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 후, 준호가 매점에서 빵을 사 들고 돌아왔다. 그는 내 옆에 앉아 빵을 건네주었다.

“오늘도 열심히네, 서연아.”

그의 말에 나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다. 민준이는 그런 우리를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씁쓸함이 스쳐 지나갔지만, 나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오직 준호의 목소리에만 귀 기울이고 있었다.

“나중에 우리 뭐 할까?”

준호가 불쑥 물었다.

“뭐든 좋아. 오빠랑 같이 하는 거면.”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준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나중에 대학 가면, 우리 같이 유럽 여행 갈까? 배낭 메고.”

“와, 정말? 생각만 해도 좋다!”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유럽 여행. 낭만적인 단어였다. 우리는 마치 이미 그곳에 있는 것처럼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하지만 그 상상 속에는 현실적인 문제란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가 어떻게 돈을 모을 것인지, 대학은 어떻게 갈 것인지, 졸업 후에는 무엇을 할 것인지. 그런 질문들은 우리의 아름다운 꿈을 흐릿하게 만들 뿐이었다.

“근데 오빠, 우리 대학은 어떻게 할 거야? 나는 지금처럼 계속 공부하면 될 것 같은데.”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준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음… 일단은 같이 열심히 해보자. 결과는 나오겠지.”

결과는 나오겠지. 그의 대답은 너무나도 막연했다. 나는 그의 말에 안심했지만, 사실 그의 대답은 나에게도 충분히 불안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나는 그 불안감을 애써 외면했다. 준호와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냥 지금처럼만 하면 돼, 서연아. 우리가 이렇게 사랑하는데, 뭐가 문제겠어.”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의 손길에 나는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래, 사랑.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었다. 미래의 일은 미래의 일이고, 현실의 어려움은 현실의 어려움이었다. 오직 지금, 우리 둘만의 세상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시간은 흘러갔다. 우리는 서로에게만 집중했고, 주변의 소리들은 점차 잦아들었다. 지민이의 걱정스러운 눈빛, 민준이의 조용한 응원, 부모님의 만류. 그 모든 것이 마치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우리는 우리만의 사랑이라는 섬에 갇혀, 바깥세상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덮어버렸던 현실의 균열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우리는 아직 너무 어렸고,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별빛 아래, 우리는 서로를 만나 눈부신 사랑을 시작했지만, 그 사랑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준호의 손을 잡고,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갈 뿐이었다. 우리의 사랑이 끝날 줄은,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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