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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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전이 두 번째 유산을 겪은 뒤, 전하의 마음은 완전히 돌아섰다.
전하는 희연에게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희연의 처소를 찾지도 않았고, 안부를 묻지도 않았다.
희연은 견딜 수 없었다.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전하께 보냈다.
궁중에서 여인이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은 매우 불길하고 큰 의미를 지닌 일이었다. 특히 희연에게 그것은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까지 내려놓는 행동이었다.
그 머리카락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었다.
‘전하, 제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저를 보아 주지 않으시옵니까?’
희연은 머리카락을 보내며 울부짖었다.
하지만 전하는 그것을 받아 들고 한참 바라보더니, 아무 말 없이 불에 태워 버렸다.
희연은 그 소식을 듣고 한참을 울었다.
그녀가 아무리 애원해도 전하의 마음은 돌아오지 않았다.
게다가 세자 책봉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전하는 그날 하루 동안 희연의 처소에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오직 중전의 처소만 찾았다.
그러던 중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유산한 지 겨우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예름의 몸이 다시 이상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어의가 급히 중전을 진찰했다.
“전하, 중전마마께서 다시 회임하신 듯하옵니다.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으니 각별히 살펴야 하옵니다.”
전하는 놀라면서도 기뻐했다.
“정말이냐? 중전이 다시 아이를 가진 것이냐?”
“그러하옵니다. 다만 중전마마의 몸이 아직 약하니 무리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전하는 예름의 손을 꼭 잡았다.
왕실에 또다시 새로운 희망이 찾아온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세자 책봉을 위한 큰 행사가 열리는 날이 되었다.
전하와 중전, 희연, 그리고 두 아이인 헌이와 준이가 모두 참석했다. 서인과 남인의 주요 인물들, 양쪽 집안의 친척들, 후궁들의 친정 부모와 대비마마까지 궁에 모였다.
그러나 희연은 아직 알지 못했다.
자신의 친척들이 이미 중전의 친정과 있었던 일을 전해 들었다는 사실을.
행사장에 들어선 희연은 친척들의 표정을 보고 이상함을 느꼈다. 그들은 희연을 바라보며 화가 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희연은 부모를 바라보았지만 부모 역시 아무 말이 없었다.
곧 전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세자 책봉을 앞두고 두 왕자의 재능과 자질을 살펴보겠다.”
첫 번째 시험은 학문이었다.
헌이는 평소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안이의 얼굴이 떠나지 않았다.
‘내가 세자가 되면 안이는 기뻐하지 않을 거야. 준이가 세자가 되기를 바랄 텐데…….’
헌이는 일부러 답을 틀리기 시작했다.
분명 알고 있는 문제에도 엉뚱한 대답을 했다.
희연은 그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왜 저러는 것이냐?’
첫 번째 시험이 끝났다.
예름의 아들 준이가 훨씬 높은 점수를 받았다.
두 번째 시험은 예술이었다.
그림과 글씨 등 예술적인 재능을 살펴보는 시험이었다.
준이는 차분하게 자신의 실력을 보여 주었다. 반면 헌이는 평소에도 그림에 재능이 없었고, 노력해도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결과는 또다시 준이의 승리였다.
희연은 손에 힘을 주었다.
마지막 시험은 효와 예의, 궁중의 예법에 관한 것이었다.
이 시험에서도 준이는 훌륭한 모습을 보였다. 어른을 공경하는 태도와 예법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헌이는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점수 차이는 점점 더 벌어졌다.
희연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어떡하지…… 이대로라면 헌이가 세자가 되지 못할 텐데.’
그때 전하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보너스 시험을 하나 더 진행하겠다. 이번에는 체력을 살펴보겠다.”
희연은 그제야 조금 안심했다.
하지만 헌이의 몸은 예전부터 약한 편이었다. 희연이 아이를 심하게 다그치고 제대로 쉬지 못하게 한 탓에 체력도 좋지 않았다.
시험이 시작되었다.
헌이는 최선을 다했지만 준이에게 아주 근소한 차이로 패했다.
마지막까지 결과는 뒤집히지 않았다.
전하는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세자 책봉의 최종 결정은 내일 발표하겠다.”
희연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날 밤, 희연은 헌이를 자신의 처소로 불렀다.
“네가 어찌 그럴 수 있느냐!”
“제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네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느냐? 네가 꼭 세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헌이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게 제 잘못입니까? 제가 뭘 잘못했는데요?”
희연은 그 말을 듣고 더욱 화가 났다.
“감히 어머니에게 그런 말을 하느냐?”
헌이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 날, 희연은 결국 참지 못하고 중궁전으로 향했다.
“야!”
희연의 거친 목소리가 중궁전에 울려 퍼졌다.
예름은 더 이상 예전처럼 참고만 있지 않았다.
“어찌 중전에게 그런 말을 하시는 것이옵니까?”
“뭐라고?”
“여기가 어디라고 이리 소리를 지르시는 것이옵니까?”
예름의 친정 식구들도 분노했다.
희연은 흥분한 나머지 예름의 아버지에게까지 손을 뻗으려 했다.
그 순간, 예름의 둘째 오라버니가 희연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는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으며, 평소에도 무서운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어디 우리 부모님께 손을 대려 하십니까?”
희연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의 손에 붙잡힌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희연은 끝까지 예름을 원망했다.
“너 때문이야…… 전부 너 때문이라고!”
예름은 희연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이제 곧 스무 살이 되는 예름과 서른이 넘은 희연.
나이로만 보면 희연이 훨씬 연상이었지만, 중전의 자리는 예름에게 있었다.
예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희연 마마. 이제는 알려 드려야겠군요.”
“무엇을 말이냐?”
“중전에게 이런 짓을 계속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말입니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이제 두 사람의 갈등은 단순한 질투나 다툼으로 끝날 수 없었다.
그리고 세자 책봉의 발표는 바로 다음 날이었다.글쓰기
희연은 이제 이성을 잃은 듯했다.
“나도 중전 자리에 앉을 수 있었어! 내가 중전이 될 수도 있었다고!”
그녀는 중전 앞에서 계속 소리를 질렀다.
“너희 집안이 대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그러는 것이냐! 너희 조상부터 할아버지까지, 대체 얼마나 잘났기에 나를 이렇게 무시하는 것이냐!”
희연은 예름의 집안 어른들까지 모욕하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들은 예름의 친정 식구들은 얼굴이 굳어졌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중전의 처소라는 사실 때문에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그때 희연의 아버지가 나타났다.
그는 딸이 벌이는 일을 보고 크게 소리쳤다.
“희연아!”
“아버지!”
희연은 아버지가 자신을 도와주러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표정은 차가웠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아버지의 손이 희연에게 향했다. 희연은 자신을 때리려는 줄 알고 움찔했지만, 그보다 먼저 아버지의 손이 희연의 팔을 붙잡았다.
“그만하거라!”
희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어찌 저에게만 그러십니까? 저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이옵니까?”
그녀는 울먹이며 말했다.
“어머니가 그렇게 되셨는데도 아버지는 저를 걱정하지 않으십니까?”
아버지는 그제야 멈칫했다.
“네 어미가…… 돌아가셨다고?”
그는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희연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중전마마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가 얼마나 힘들어하셨는지 아십니까?”
한때 누구보다 사랑했던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에 아버지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는 예름을 바라보았다.
희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예름에게 다시 다가가려 했다.
“당신이 우리 어머니를 이렇게 만든 것이오!”
그러나 예름은 아직 회임 초기였다. 몸을 조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예름의 언니가 급히 동생 앞을 가로막았다.
“안 됩니다! 동생에게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희연이 손을 뻗는 순간, 예름의 언니가 대신 맞았다.
“언니!”
예름이 놀라 소리쳤다.
중궁전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그때 희연의 아버지가 다시 손을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희연의 첫째 오라버니가 아버지의 팔을 붙잡았다.
“아버지, 이제 그만하십시오.”
그리고 그는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딸 교육을 어찌 시키셨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까?”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예름의 아버지까지 중궁전에 들어왔다.
그는 희연의 집안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송씨 집안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직 모르겠습니까? 우리 집안과 중전마마께 한 일을 반드시 책임지게 될 것입니다.”
예름은 언니를 걱정하며 소리쳤다.
“아버지, 언니를 먼저 살펴 주십시오! 모두 잠시 나가 주시옵소서!”
하지만 희연과 그녀의 아버지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때였다.
희연의 오라버니가 중궁전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보고 더는 참지 못했다.
그가 사랑했던 여인은 예름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가족이 예름에게 두 번이나 큰 상처를 남겼고, 이제는 또다시 중전에게 손을 댄 것이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와 실망이 가득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희연은 오라버니를 보자마자 다가갔다.
“오라버니!”
그녀는 오라버니에게 안기려 했다.
하지만 오라버니는 희연을 밀어내며 따끔하게 꾸짖었다. 희연은 그 충격에 얼굴을 감싸 쥐었다.
“오라버니…… 어찌 저에게 이러십니까?”
오라버니는 차갑게 대답했다.
“그만해라. 어머니께서 마지막으로 뭐라고 하셨는지 기억하지 못하느냐?”
희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 송씨 집안에 망신을 주지 말라고 하셨잖아. 그런데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이냐?”
그는 예름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는 세 차례 깊이 머리를 숙였다.
“중전마마, 부디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집안의 잘못이옵니다. 저희가 저지른 죗값은 반드시 치르겠습니다.”
예름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희연의 아버지는 못마땅한 표정이었고, 희연 역시 오라버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라버니는 더 이상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그렇게 희연의 가족은 중궁전을 떠났다.
그러나 희연의 분노는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처소로 돌아오자마자 헌이를 불렀다.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
“어머니…….”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이 무엇이었느냐! 네가 세자가 되는 것 아니었느냐? 그런데 그 소원 하나도 지키지 못한단 말이냐?”
희연은 울면서 헌이를 몰아붙였다.
“내가 중전이 될 수도 있었어! 우리 집안도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야!”
그때 헌이가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큰소리를 냈다.
“어머니!”
희연은 깜짝 놀라 아들을 바라보았다.
헌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지금까지 어머니가 하라는 대로 다 참았어요. 어머니가 화를 내셔도 참았고, 저를 혼내셔도 참았어요.”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머니가 하라는 대로 살지 않을 거예요.”
“뭐라고?”
“저는 예전 중전마마께 어머니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싶어요. 저를 때리고, 중전마마를 괴롭히고, 우리 집안이 저지른 일도 전부 말할 거예요.”
헌이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했다.
“내일 세자 책봉 자리에서 전부 이야기할 거예요.”
희연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네가 감히…….”
“저를 때리실 거면 때려 보세요. 이제는 무섭지 않아요.”
헌이는 어머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가 세자가 되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아요. 저는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그 말은 희연의 가슴을 찔렀다.
헌이는 더 이상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처소를 나가 버렸다.
희연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헌아…… 헌아!”
아무리 불러도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희연은 결국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대감마님!”
희연의 아버지가 갑자기 뒷목을 붙잡더니 쓰러진 것이었다.
“아버지!”
희연은 놀라 달려 나갔다.
“아버지, 정신 차리십시오! 아버지!”
그녀는 아버지를 붙잡고 울었다.
어머니를 잃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아버지까지 쓰러진 것이다.
희연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떡하지…… 이제 어떡해…….”
그날 밤, 희연에게는 더 이상 의지할 곳이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 날은 세자 책봉의 최종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