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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서점 구석, 쇼펜하우어와의 운명적 만남

세상의 부조리에 지친 민준이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발견한다. '인생은 고통'이라는 그의 명제에 깊은 공감을 느끼며, 민준은 철학자의 세계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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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익숙한 잉크 냄새와 종이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김민준은 평소처럼 아무 생각 없이 책등을 훑으며 서점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머릿속은 여전히 어젯밤 직장 동료 박수현의 얄미운 잔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김민준 씨, 이번 프로젝트 말이에요. 제가 제안했던 아이디어를 좀 더 발전시켜서….” 아,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났다. 마치 귓가에 맴도는 파리 소리 같았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 서로를 깎아내리고, 자신의 공을 가로채려 안달인 걸까. 세상은 온통 시기와 질투, 기만과 배신, 모략과 정치질의 소음으로 가득 찬 거대한 소음 공장이었다.

“에휴.”

민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철학 서적 코너로 향했다. 이럴 때일수록 뭔가 머리를 식힐 만한 것을 찾아야 했다. 왠지 모르게 그의 발길은 ‘고통’과 ‘염세’라는 단어들을 연상시키는 책들에 이끌렸다. 그러다 그의 눈에 띈 한 권의 책. 낡고 두꺼운 양장본에 큼지막하게 쓰인 제목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저자는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이름을 들어본 적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

호기심에 책을 집어 들었다. 묵직한 무게감이 그의 손에 묵직하게 와 닿았다. 펼쳐든 첫 페이지, 그의 눈을 사로잡은 문장.

“인생은 본질적으로 고통이다.”

민준은 숨을 멈췄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진실을 누군가가 시원하게 외쳐준 듯한 기분이었다. 고통. 그래, 인생은 고통이지. 시기 질투에 시달리고, 배신에 상처받고, 모략에 휘둘리고, 정치질에 지쳐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이 바로 인생이었다. 그는 마치 운명처럼 이 책에 빠져들었다.

“세상은 우리의 의지가 만들어낸 표상일 뿐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원하고, 그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때 고통받는다.”

그의 머릿속에서 박수현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원했다.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인정, 더 많은 찬사. 그리고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민준을 이용하고, 방해했다. 민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그의 욕망은 끊임없이 세상의 소음에 의해 흔들렸다.

“모든 고통의 근원은 의지, 즉 맹목적이고 끊임없는 욕망이다.”

민준은 쇼펜하우어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그의 삶은 끊임없는 욕망의 굴레였다. 더 나은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 더 행복해지고 싶다는 바람. 이 모든 것이 결국 더 큰 고통을 불러오는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책장을 넘기며 쇼펜하우어의 염세적인 철학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세상은 허무하고, 우리의 삶은 덧없으며, 결국 모든 것은 고통으로 귀결된다는 그의 말들은 민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허무함과 절망감을 그대로 대변해 주는 듯했다.

“인간은 잠시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순간, 지루함이라는 또 다른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순간 민준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이지, 이 철학자는 그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끊임없이 일에 치여 살았고, 주말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잠시라도 쉬면 곧바로 밀려오는 허전함과 지루함. 그것 역시 고통이었다.

그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인생의 해독제’처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세상의 부조리와 인간의 어리석음을 이해하는 순간,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묘한 경험을 했다. 더 이상 세상의 소음에 상처받을 필요도, 분노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인생은 고통이고,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니까.

“어쩌면… 이 모든 소음은 그저 ‘표상’일 뿐인지도 몰라.”

민준은 책을 품에 안고 서점 문을 나섰다. 그의 발걸음은 이전과는 달리 한결 가벼워 보였다. 그의 머릿속은 더 이상 박수현의 얄미운 잔소리나 회사 동료들의 시기 어린 눈빛으로 가득 차 있지 않았다. 대신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민준은 곧바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다시 한번 펼쳤다. 그리고 그의 옆에 놓여 있던 낡은 노트와 펜을 집어 들었다.

‘그래, 이제부터 나의 ‘침묵의 기록’을 시작하는 거야.’

그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세상의 소음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고요한 세계를 구축하려는 시도였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했다.

“2023년 10월 27일. 나는 오늘, 세상의 헛된 욕망과 그로 인한 고통의 본질을 깨달았다. 이제부터 나는 이 모든 것을 기록할 것이다. 나의 침묵의 기록을 통해, 나는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는 펜을 움직이며 자신의 일상 속에서 겪었던 시기와 질투, 기만과 배신, 모략과 정치질의 순간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그는 그 사건들을 냉소적인 시선으로,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기록했다.

‘박수현 대리. 그녀는 승진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표상으로 삼아 끊임없이 주변을 공격한다. 마치 굶주린 사자가 먹이를 쫓듯, 그녀의 의지는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그 끝은 결국 더 큰 고통일 뿐. 그녀는 아직 ‘의지’의 맹목함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마치 소설을 쓰듯, 혹은 희곡을 쓰듯,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분석하고 기록했다. 그의 글은 객관적이면서도 날카로웠다. 때로는 자신의 어리석었던 순간들도 솔직하게 적어 내려갔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평범하고 조용하게 살고 싶다는 나의 의지는, 역설적으로 세상의 소음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만들었다. 세상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그 속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나의 욕망이야말로, 나를 또 다른 고통으로 이끄는 ‘의지’가 아닌가.’

그는 자신의 글을 읽으며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묵혀왔던 체증이 풀리는 듯한 시원함이었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그의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고, 세상의 소음 앞에서 무너지지 않도록 지지해 주는 든든한 기둥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그의 ‘침묵의 기록’은 예상치 못한 파장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그의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한 것은 역시나 박수현이었다. 민준이 더 이상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분석하듯 바라본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민준 씨, 요즘 뭐 그리 재미있는 거라도 쓰세요? 얼굴이 훨씬 좋아지셨네요.”

어느 날 점심시간, 수현이 민준의 책상 앞에 다가와 힐끗 그의 노트를 쳐다보며 물었다. 민준은 태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그냥 제 생각 좀 정리하고 있어요. 쇼펜하우어라는 분의 책을 읽고 있는데, 좀 흥미로운 게 있어서요.”

“쇼펜하우어요? 그 염세주의자요? 그런 걸 읽고 있으면 기분이 더 우울해지지 않아요?”

수현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민준이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내용을 쓰고 있다고 오해한 것이 분명했다. 민준은 그녀의 반응을 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나의 ‘침묵의 기록’은 오히려 더 큰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는지도 몰라.’

그의 기록은 주변 사람들의 오해와 질투를 불러일으켰다. 민준이 자신을 비판하는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한 동료들은 그를 더욱 경계하기 시작했고, 그의 평온한 태도는 오히려 그들의 질투심을 자극했다.

“민준 씨, 요즘 너무 여유로워 보이는 거 아니에요? 그러다 나중에 후회할지도 몰라요.”

“글쎄요, 저는 지금이 좋습니다. 어차피 인생은 고통의 연속인데, 굳이 불필요한 소음으로 자신을 괴롭힐 필요가 있을까요?”

민준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방패 삼아 그들의 공격을 받아넘겼다. 그의 어설픈 철학적 답변은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최영철, 그의 오랜 친구 역시 민준의 변화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민준아, 너 요즘 좀 이상해. 쇼펜하우어 책을 그렇게 파고들더니, 무슨 세상 다 산 사람처럼 그러냐?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면 재미없잖아.”

“영철아, 나는 그저 세상의 본질을 보고 있을 뿐이야. 세상은 원래 시끄럽고, 사람들은 어리석어. 그걸 깨닫는 순간,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져.”

“편안해지긴 뭘 편안해져. 네가 그렇게 스스로를 고립시키면 더 외로워질 뿐이야. 그래도 친구잖아. 힘들면 나한테 이야기하라고.”

영철은 진심으로 민준을 걱정했다. 하지만 민준은 이미 쇼펜하우어의 세계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상태였다. 그는 영철의 조언을 들었지만, 그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침묵의 기록’은 계속되었다.

어느 날, 민준은 동네 카페에서 우연히 이지혜를 마주쳤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민준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가 생각하는 이상향 그 자체였다. 세상의 소음에 흔들리지 않는 고요함, 사려 깊은 눈빛.

그는 그녀를 관찰하며 또다시 펜을 움직였다.

‘이지혜 씨. 그녀는 세상의 헛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 보인다. 그녀의 고요함 속에는 ‘의지’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드리워져 있을 뿐, 그 맹목적인 힘에 휩쓸리지 않는다. 그녀는 어쩌면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로부터의 해방’을 이미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녀를 자신의 기록에 영감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녀의 모습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그녀의 행동에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투영했다.

그의 ‘침묵의 기록’은 점점 더 깊이를 더해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가 세상의 소음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세상은 더 시끄럽게 그의 곁을 맴돌았다. 그의 기록은 의도치 않게 주변 사람들의 오해를 증폭시켰고, 그의 고요한 의지는 오히려 더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는 서점 구석에서 쇼펜하우어를 만나 ‘인생은 고통’이라는 진리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침묵의 기록’이라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표현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침묵은 예상치 못한 오해와 질투를 불러왔고, 그의 기록은 오히려 더 큰 소음을 만들어내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였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 자신의 기록을 다시 읽어 내려갔다. 그의 글은 점점 더 냉소적으로 변해갔지만, 그 속에는 묘한 유머가 깃들어 있었다. 세상의 부조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웃음을 찾아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 어쩌면 세상의 소음은 완전히 차단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몰라. 오히려 그 소음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나만의 방식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겠지.’

그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바탕으로, 세상의 부조리를 유머러스하게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그의 ‘침묵의 기록’은 이제 세상에 대한 비판이 아닌, 세상과의 어설픈 타협이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남기 위한 투쟁의 기록이 될 터였다. 그의 펜은 멈추지 않았다. 세상의 소음은 계속될 것이고, 그의 침묵의 기록 역시 계속될 것이었다. 마치 끊임없이 이어지는 인생의 고통처럼, 그의 기록 역시 끝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그 고통에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속에서 자신만의 유쾌한 체념을 발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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