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이게… 사랑인가요? 엉뚱녀에게 흔들리는 마음
율곡은 어떻게든 단아와의 혼인을 파투내려 하지만, 단아는 오히려 율곡의 허점을 파고들며 예상치 못한 매력을 발산한다. 율곡은 단아를 피하려 할수록 자꾸만 엮이는 상황에 혼란스러워한다.
이게… 사랑인가요? 엉뚱녀에게 흔들리는 마음
이율곡은 서책에 코를 박고 있었다. 벼루에 먹을 갈던 손길이 멈춘 것은 귓가에 맴도는 앵앵거림 때문이었다. 마치 귓속에 갇힌 파리처럼, 그 목소리는 율곡의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들었다.
“도령님! 여기 계셨군요! 아까부터 얼마나 찾았는지 몰라요! 이리 오세요, 저기 맛있는 떡이 있대요!”
김단아였다. 율곡의 정혼자. 아니, 엄밀히 말하면 정혼자라는 이름으로 묶여버린 불운의 대상이었다. 율곡은 융통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딱딱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모든 것이 규칙과 원칙대로 흘러가야 직성이 풀리는 그에게, 김단아라는 존재는 마치 깨끗한 붓으로 그린 수묵화에 묻은 붉은 흙탕물 같았다.
“무례하다. 내게 먼저 허락도 없이 함부로 부르지 말라.” 율곡은 붓끝을 벼루에 톡 내리치며 차갑게 말했다. 벼루가 쩍 하고 금이 가는 소리가 났다. 율곡은 그것마저 신경질이 났다.
단아는 율곡의 싸늘한 말에도 전혀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율곡의 벼루를 내려다보았다. “어머나, 벼루가 아팠나 봐요. 제가 너무 죄송해요. 다음부터는 살살 부를게요.”
살살 부르라고? 율곡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벼루가 아팠다는 말에, 율곡은 잠시 멍해졌다. 저 엉뚱한 대답에 기분이 풀리기는커녕, 더 혼란스러워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 여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걸까.
“그 떡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내게 말할 정도면 꽤나 귀한 물건일 터. 혹여 네가 훔친 것은 아니겠지?” 율곡은 뼈 있는 농담을 던졌다. 율곡의 날카로운 질문에 보통 사람이라면 얼굴을 붉히거나 당황했을 터였다. 하지만 단아는 태연했다.
“훔치다니요! 제가 뭘 훔치겠어요. 복순이 언니가 오늘 아침에 갓 만든 찹쌀떡이라는데, 꿀을 얼마나 많이 넣었는지 몰라요. 한 입 맛보면 입안에서 꽃이 피는 기분이래요!” 단아는 신이 나서 재잘거렸다. 율곡은 ‘입안에서 꽃이 피는 기분’이라는 말에 잠시 멈칫했다. 왠지 모르게 그 표현이 마음에 걸렸다.
“입안에서 꽃이 피는 기분이라… 네 혀는 참으로 요란하구나. 혀 밑에 꿀이라도 발라놓은 것이냐?” 율곡은 짓궂게 물었다.
단아는 율곡의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혀 밑에요? 아니요, 혀 밑에는 아무것도 없는데요. 떡을 먹으면 혀가 행복해지는 기분이라고요!”
그녀의 순진한 대답에 율곡은 한숨을 쉬었다. 더 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율곡대로, 단아는 단아대로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듯했다. 율곡은 결심했다. 이 혼인은 어떻게든 파투를 내야 한다. 집안의 압박이 아무리 거세다 해도, 이토록 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과는 한 평생을 살 수 없다고.
“나는 바쁘다. 네게 쓸 시간이 없다. 떡은 네가 알아서 먹어라.” 율곡은 붓을 챙겨 방을 나서려 했다.
“도련님! 잠깐만요!” 단아가 율곡의 소매를 덥석 잡았다. 율곡은 움찔하며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맨살에 닿는 그녀의 손길이 낯설었다.
“그 벼루 말이에요. 금이 갔으니 새로 사셔야겠어요. 제가 도련님 댁 근처 장터에서 제법 쓸 만한 벼루를 본 것 같은데, 같이 가보실래요? 제가 잘 골라드릴게요!” 단아는 재촉하듯 율곡의 팔을 잡았다.
율곡은 단아의 적극적인 행동에 당황했다. 벼루를 골라주겠다니. 아니, 벼루를 골라준다는 것보다, 그 벼루를 보러 함께 장터에 가자는 제안 자체가 황당했다. 율곡은 자신의 세상에 흠집을 내는 존재 자체를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벼루에 금이 간 것은 자신의 부주의함 때문이었다. 그것을 굳이 남에게, 그것도 김단아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필요 없다. 나는 내 물건을 직접 고른다. 그리고 너와 함께 장터에 갈 이유가 없다.” 율곡은 단호하게 말했다.
“왜요? 도련님은 꼼꼼하시니 좋은 벼루를 고르시겠지만, 혹시라도 흠집이 있거나 짝이 안 맞으면 어떡해요. 제가 같이 가면 그런 실수를 막아드릴 수 있잖아요!” 단아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했다. 율곡은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벼루에 짝이 안 맞다니. 저런 엉뚱한 소리를 하는 여자를 상대하며 혼인을 유지하라고?
“네가 벼루의 짝을 맞춰 줄 수 있다는 말이냐? 벼루는 짝이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네 도움 따위 필요 없다.” 율곡은 마지막 말을 강조하며 단아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러나 단아는 끈질겼다. 율곡의 등 뒤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제가 도련님 댁으로 가서 벼루를 골라드릴까요? 도련님은 바쁘시니 제가 대신 다녀오면 되잖아요!”
율곡은 걸음을 멈추었다. 단아가 자신의 집으로 온다고? 그건 더 위험한 상황이었다. 율곡의 집안은 명문 사대부 집안이었다. 엄격한 규율과 예법이 존재했고, 흠집 하나 없는 완벽한 이미지를 추구했다. 그런 곳에 김단아가 발을 들인다는 것은, 율곡 자신에게도 큰 흠집이 되는 일이었다.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내 집에는 함부로 드나들 수 없다.” 율곡은 거의 절규하듯 말했다.
단아는 율곡의 반응에 오히려 의아해했다. “왜요? 도련님 댁은 참 좋던데요. 마당도 넓고, 꽃도 많고… 아, 그리고 아까 오면서 보니까 마당 구석에 닭장도 있던데, 닭이 참 귀여웠어요!”
닭장이라니. 율곡의 집안에 닭장이 있다는 사실을 저 왈가닥 아씨가 알고 있었다니. 율곡은 충격에 휩싸였다. 율곡의 집안에 닭이 있는 것은 극비 사항이었다. 가문의 명예에 흠이 될 만한 일이었기에, 아무에게도 알려져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너… 너는 도대체 무엇을 보았느냐! 내 집에 닭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율곡은 흥분하여 단아에게 다가갔다.
단아는 율곡의 격한 반응에 오히려 불안해졌다. “어머, 도련님. 왜 그렇게 화를 내세요. 그냥 닭이 귀여워서 그렇잖아요. 제가 닭을 좋아해서 그런지, 닭이 저를 보고 반갑다고 꼬꼬댁거렸어요.”
닭이 꼬꼬댁거렸다고? 율곡은 단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닭은 닭일 뿐, 사람을 보고 반갑다고 꼬꼬댁거릴 리가 없었다. 단아는 율곡의 집안 분위기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 닭은… 그 닭은 특별한 닭이 아니다. 그냥… 그냥 닭이다. 너는 더 이상 내 일에 끼어들지 마라.” 율곡은 억지로 감정을 추스르며 말했다. 율곡은 단아의 순수함인지, 뻔뻔함인지 모를 태도에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율곡이 단아의 집착 아닌 집착을 피해 서둘러 자리를 뜨려 할 때였다. 갑자기 단아가 쿵, 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율곡은 깜짝 놀라 단아에게 다가갔다.
“괜찮으냐!”
“아이고, 무릎이야… 율곡 도련님 때문에 정신이 팔려서 그만… 굴러떨어졌어요.” 단아는 훌쩍이며 무릎을 감쌌다.
율곡은 당황했다. 굴러떨어졌다고? 율곡이 그녀를 밀친 것도 아닌데. 하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율곡은 율곡대로 원칙주의자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잔인한 사람은 아니었다. 특히 어린 여자아이처럼 훌쩍이는 단아를 보니, 율곡의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흔들렸다.
“일어나라. 내가 부축해주겠다.” 율곡은 어쩔 수 없이 단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단아는 율곡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녀의 손은 율곡의 손보다 훨씬 작고 부드러웠다. 율곡은 묘한 떨림을 느꼈다.
“정말 괜찮으냐. 무릎이 다 까졌다.” 율곡은 단아의 무릎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괜찮아요. 금방 나을 거예요. 아, 그런데 도련님 손이 참 따뜻하네요.” 단아는 율곡의 손을 놓지 않고 말했다.
율곡은 그녀의 말에 다시금 당황했다. 손이 따뜻하다니. 율곡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평소에는 차갑다고 생각했는데.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마라.” 율곡은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미묘한 홍조가 감돌았다.
단아는 율곡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도련님,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요? 혹시 저 때문에 부끄러우신 거예요?”
“무슨 말이냐! 나는 네게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율곡은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더 떨리고 있었다.
율곡은 단아를 어떻게든 떨쳐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꾸만 그의 곁에 맴돌았다. 벼루 때문에, 닭 때문에, 그리고 이제는 무릎 때문에. 율곡은 단아를 피하려 할수록, 오히려 그녀에게 더 깊이 얽혀드는 자신을 발견했다.
며칠 뒤, 율곡은 서책을 읽다가 문득 단아를 떠올렸다. ‘입안에서 꽃이 피는 기분’이라는 말. ‘닭이 꼬꼬댁거렸다’는 말. 그리고 ‘손이 따뜻하다’는 말. 율곡은 자신이 왜 그런 말들에 신경 쓰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히 그녀는 율곡의 완벽한 세상에 흠집을 내는 존재였다. 그런데 왜 자꾸만 그녀의 엉뚱한 말과 행동이 머릿속을 맴도는 것일까.
율곡은 벼루를 보았다. 여전히 쩍 금이 가 있었다. 율곡은 벼루를 새로 사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단아가 벼루를 같이 골라주겠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왠지 모르게, 율곡은 장터에 나가 벼루를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율곡은 핑계를 대고 장터로 향했다. 벼루 가게 앞에 서서 여러 벼루를 살펴보았다. 제법 괜찮은 벼루들이 많았다. 하지만 율곡은 어떤 벼루를 골라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벼루의 ‘짝’이라는 것이 있는지, 벼루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지, 율곡은 그런 것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때, 율곡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여기서 뭐 하세요? 벼루 사시는 거예요?”
김단아였다. 율곡은 단아를 보자마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이렇게 타이밍이 기가 막힌단 말인가.
“너는 어찌 여기에…!” 율곡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복순이 언니랑 같이 시장 구경 나왔다가 도련님을 만났어요! 어때요, 이 벼루! 색깔도 곱고, 만져보니 느낌도 좋아요! 왠지 도련님 붓이랑 잘 맞을 것 같아요!” 단아는 율곡의 손에 벼루 하나를 쥐여주며 말했다.
율곡은 단아가 쥐여준 벼루를 받아 들었다. 묵직한 느낌이 손에 전해졌다. 짙은 검은색에 은은한 광택이 도는 벼루였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이… 이것이 나와 잘 맞는단 말이냐?” 율곡은 묻고 싶었다. ‘벼루가 행복해할까?’라고.
단아는 율곡의 손에 쥐어진 벼루를 보며 활짝 웃었다. “그럼요! 왠지 모르게 도련님 붓이랑, 도련님 마음이랑 잘 맞을 것 같아요!”
율곡은 단아의 말에, 그리고 그녀의 웃음에 왠지 모를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혼란스러움이었고, 당황스러움이었으며,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설렘 같은 것이었다. 율곡은 자신이 김단아라는 엉뚱하고 칠칠치 못한 여자에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더 이상은 안 된다.
하지만 율곡은 알고 있었다. 자신은 이미 김단아라는 파도에 휩쓸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파도는 왠지 모르게, 율곡이 평생 느껴보지 못한 따뜻함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벼루를 손에 쥔 율곡의 눈빛이 복잡하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