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진언의 메아리, 의심의 그림자
며칠이 지나도 수현의 일상에는 큰 변화가 없다. 여전히 직장에서는 상사의 잔소리가 끊이지 않고, 퇴근길 지하철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진언을 읊조릴 때마다 마음이 조금은 차분해지는 듯도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평화인지, 아니면 그저 잠시의 착각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한 걸까?' 의구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친구에게 책에 대해 이야기하자, 친구는 '그냥 마음 편하게 먹는 게 낫지 않겠냐'며 핀잔을 준다. 수현은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진언을 계속해야 할지, 아니면 여기서 멈춰야 할지 갈등하던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가보기로 마음먹는다. 어쩌면 아직 진언의 진정한 힘을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감과 함께.
수현의 일상은 마치 멈춰버린 시계처럼, 혹은 쉼 없이 돌아가지만 제자리걸음인 쳇바퀴처럼 느껴졌다. 책을 펼친 지 벌써 며칠이 흘렀지만, 그녀의 삶에 눈에 띄는 변화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알람 소리에 짜증을 내며 눈을 떴고, 출근길에는 꽉 막힌 도로 위에서 답답함을 삼켰다. 사무실에 도착하면,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까다로운 상사의 쉴 새 없는 잔소리였다. “수현 씨, 이 보고서 말이야, 어제까지 끝내기로 했잖아. 왜 이렇게 늦었어? 집중 안 해?” 쏘아붙이는 듯한 목소리에 수현은 어깨를 움츠리며 겨우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점심시간에도 동료들의 시시콜콜한 뒷담화나 업무에 대한 불평이 오가는 대화 속에서 그녀는 그저 조용히 밥을 먹을 뿐이었다.
퇴근길 지하철은 언제나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좁은 공간에 부대끼며 서 있으면, 무거운 가방과 함께 육체적인 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피로까지 어깨를 짓눌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텅 빈 집 안에서 홀로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마친 후, 그녀는 다시금 그 낡은 책을 펼쳤다. ‘천수경, 마음을 비추는 108가지 주문’. 책갈피 사이에 끼워진 얇은 종이에는 낯선 글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어제는 3번째 주문을 따라 읊조렸다. ‘옴 아모가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르타야 훔.’ 처음에는 그저 소리 내어 읽는 것에 불과했지만, 며칠간 반복하다 보니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조금은 차분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 하나를 던졌을 때, 일렁이는 파문처럼.
하지만 그 느낌은 너무나 미미했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상사의 날카로운 질책이나 지하철 안에서의 불편함, 혹은 홀로 남겨진 고독감 같은 현실의 무게감 앞에 그 작은 파문은 맥없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게 정말 효과가 있는 걸까? 아니면 그저 내 마음이 만들어낸 착각일 뿐일까?’ 의구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기 시작했다. 책을 펼치기 전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은 마찬가지였는데, 지금이라고 무엇이 달라졌단 말인가. 오히려 헛된 기대를 품었던 자신에게 실망감이 밀려왔다.
그날 저녁, 오랜만에 친구 지혜에게서 연락이 왔다. “수현아, 오랜만이야! 주말에 시간 돼? 우리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갈까?” 수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책에 대해 털어놓기로 했다. “지혜야, 사실 요즘 내가 좀 힘든 일이 있어서… 그래서 우연히 이런 책을 보게 됐는데, 매일매일 주문을 따라 읊조리는 거야. 그런데 사실 잘 모르겠어. 효과가 있는 건지.”
전화기 너머로 지혜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엥? 주문? 무슨 무협지 같은 소리야. 수현아, 너 요즘 너무 스트레스받아서 헛것이 보이는 거 아니야? 그냥 맛있는 거 먹고, 신나는 영화나 보면서 푹 쉬는 게 최고지. 그런 거에 너무 신경 쓰지 마.”
지혜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게 더 현실적이고, 더 빠른 해결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현의 마음 한편에서는 작은 반항심이 일어났다. ‘내가 헛것을 보는 걸까?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일까?’ 지혜의 현실적인 조언은 오히려 수현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친구의 말대로라면, 이 책은 그저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어쩌면 자신처럼 삶에 지친 사람들이 혹시라도 희망을 품을까 봐 헛된 기대를 주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현은 책을 덮을 수 없었다. 그녀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108번째 주문까지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혹시 아직 내가 진정한 힘을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몰라.’ 희미한 기대감이었다. 마치 어두운 동굴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처럼. 그녀는 다시 한번 낯선 주문들을 천천히 따라 읊조렸다. 이번에는 조금 더 집중해서, 마치 주문 속에 담긴 의미를 헤아리려는 듯.
4번째 주문이었다. ‘옴 니샤차라 야크샤 락샤사 람차야 훔 파트 스바하.’
주문을 읊조리던 수현의 눈앞에, 며칠 전 직장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상사의 날카로운 질책에 움츠러들었던 자신, 동료들 앞에서 창피함을 느꼈던 순간. 그때의 답답함과 분노가 다시금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 ‘이런 상황에서 주문을 외운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그녀는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혹은 무의식적으로라도 주문을 계속해서 읊조렸다. ‘옴 니샤차라 야크샤 락샤사 람차야 훔 파트 스바하.’ 몇 번이고 반복하자, 신기하게도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던 답답함이 조금씩 가라앉는 듯했다. 마치 뜨거운 물에 찬물을 붓는 것처럼.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이 주문이 상사의 질책을 없애주거나, 동료들의 시선을 바꾸지는 못한다는 것을. 하지만 적어도, 그 상황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조금은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상사의 질책을 개인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그저 업무 지적의 한 부분으로, 혹은 상사의 스트레스가 투영된 결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분노와 답답함 대신, ‘아, 내가 이번에는 좀 더 신경 써야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바로 진언의 힘일지도 몰랐다. 외부 상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마주하는 자신의 마음을 바꾸는 힘. 그것은 마법처럼 즉각적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다음날, 수현은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출근했다. 상사의 보고서에 대한 지적이 다시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녀가 움츠러들지 않았다. “네, 팀장님. 제가 이번에는 좀 더 꼼꼼하게 확인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차분하고 담담한 목소리였다. 상사는 평소처럼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대신,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그래, 그래. 하여튼 잘 해보자고.”라며 말을 돌렸다.
그것은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수현에게는 큰 의미였다. 그녀는 점심시간에 동료들의 대화에 억지로 끼어들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샌드위치를 먹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잿빛 하늘 아래,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느껴졌다. 각자의 삶 속에서 저마다의 어려움과 고뇌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 속에서 자신 역시 그저 하나의 점일 뿐이라는 생각에, 묘한 연대감과 함께 마음이 편안해졌다.
퇴근길 지하철은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지만, 수현은 더 이상 답답함을 느끼지 않았다. 붐비는 인파 속에서 오히려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모두들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고 있구나.’ 그녀는 가방 속 책을 슬쩍 만지며 미소 지었다. 5번째 주문을 읊조렸다. ‘옴 마니 반메훔.’
집으로 돌아온 수현은 그날따라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가벼웠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마친 후,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들었다. 108가지 주문 중, 오늘 그녀에게 가장 큰 울림을 준 주문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주문을 통해 무엇을 느꼈는지 짤막하게 메모하기 시작했다.
‘5번째 주문, 옴 마니 반메훔. 타인의 삶을 엿보며, 나 역시 그 일부라는 것을 느꼈다. 붐비는 지하철이 더 이상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따뜻한 온기처럼.’
그녀는 미소 지었다. 아직 갈 길은 멀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의심의 그림자에 갇혀 있지 않았다. 진언의 메아리가 그녀의 마음에 희미하게나마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의심의 그림자는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6번째 주문을 따라 읊조렸다. ‘옴 아라한 아라하타야 스바하.’ 그 주문처럼, 그녀의 마음속에도 조금씩 평온이라는 보석이 싹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