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왕위가 뭐라고

왕위 찬탈을 노리는 수양대군의 야욕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궁궐 안을 맴도는 불길한 그림자와 속삭임은 어린 왕의 마음에 서서히 균열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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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궁궐의 돌담을 타고 번져가는 핏빛 야욕은 어린 왕의 귀를 간질이며 뱀처럼 스며들었다. 수양대군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복도는 텅 비었건만, 귓가에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마치 수많은 눈들이 어린 왕을 꿰뚫고, 수많은 손들이 왕관을 탐하는 듯한 착각. 단종은 얇은 손으로 옥좌의 차가운 팔걸이를 꽉 움켜쥐었다. 부드러운 비단 옷자락도 그의 떨리는 손길을 막지 못했다.

“폐하, 또 밤을 지새우셨습니까.”

가온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마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희미한 등불 하나가 켜진 듯, 단종의 고요한 절망 속으로 파고드는 온기였다. 가온은 늘 그랬다. 소리 없이 다가와, 말없이 곁을 지키고, 아무런 대가 없이 위로를 건넸다. 단종은 고개를 들어 가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흔들림 없는 눈빛, 덤덤한 표정. 가온은 마치 단종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듯, 그의 불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수양 삼촌… 그분께서… 또 제게서 무언가를 빼앗으려 하시는 것 같아.”

애써 삼킨 말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어린 왕의 목소리는 얇고 떨렸지만, 그 안에는 이미 세상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신하들의 귓속말, 암암리에 퍼지는 소문들. 왕위를 탐하는 자들의 욕망은 어린 왕의 순수한 마음을 좀먹었고, 그의 눈동자에는 불안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가온은 말없이 단종의 곁에 다가앉았다. 차가운 궁궐의 공기 속에서도 가온의 존재만은 따뜻했다. 그녀는 단종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굳게 닫힌 단종의 입술 사이로, 희미한 숨결이 새어 나왔다.

“신하들은… 모두 저를 해치려 하는 것만 같아요. 제 것이 아닌 것을 탐내고… 제 것이 당연한 것을 빼앗으려 하고…”

단종의 목소리에 절망이 묻어났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웃음기 사라진 신하들의 얼굴, 굳게 다문 입술, 의미심장한 눈빛들. 그 모든 것이 어린 왕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들은… 왕위가 그렇게도 좋단 말인가요?”

단종의 물음은 텅 빈 궁궐에 메아리쳤다. 왕위. 그 단어는 어린 왕에게 있어 무거운 짐이자, 끝없는 의심의 대상이었다. 그는 늘 자신에게 주어진 왕관의 무게를 느끼며, 끊임없이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경계해야 했다.

“왕위는… 폐하의 것입니다.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오직 폐하께서만 가지실 수 있는 것입니다.”

가온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마치 굳건한 바위에 파도가 부딪히듯, 단종의 불안을 잠재우는 힘이 있었다. 그녀는 단종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어떠한 흔들림도, 어떠한 가식도 없었다. 오직 단종을 향한 변함없는 믿음만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저를… 저를 믿지 않아요. 어린 제가… 왕으로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단종의 목소리에는 어린아이 같은 서러움이 묻어났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어른들의 야망 속에서, 홀로 외로운 섬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모든 것이 낯설고, 모든 것이 위협적이었다.

“폐하께서는… 누구보다 순수하신 분이십니다. 누구보다… 백성을 생각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왕으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닙니까.”

가온은 단종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지만, 그 온기는 단종의 떨리는 심장을 조금씩 녹여갔다. 단종은 가온의 손을 잡은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에 맺혔던 불안의 그림자가 조금씩 옅어지는 듯했다.

“가온… 네가…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말끝을 잇지 못하고 단종은 가온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얇은 어깨가 격렬하게 떨렸다. 어린 왕의 슬픔과 분노, 그리고 세상에 대한 깊은 불신이 그의 몸을 뒤흔들었다. 가온은 말없이 단종을 안아주었다. 그녀의 품은 단종에게 있어 유일한 안식처였다. 세상의 모든 비난과 의심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

“괜찮으십니까, 폐하.”

가온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종의 흐느낌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마치 억눌렀던 모든 감정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듯했다. 어린 왕의 고독, 배신감,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향한 세상의 냉대.

“그들은… 단지 왕위만 바라는 것이 아니야. 그들은… 나를, 나를… 전부 빼앗으려 해.”

단종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렸다. 그의 눈빛은 어느새 차갑게 변해 있었다. 순수했던 어린 왕의 얼굴에, 잔혹한 광기가 스쳐 지나갔다. 가온은 그 변화를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단종의 내면에 숨겨진 칼날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칼날이 세상에 닿기 전에, 늘 곁에서 그것을 막아왔다.

“폐하, 진정하십시오. 폐하께서는…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가온은 단종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녀의 손길은 마치 얼어붙은 강물 위에 온기를 불어넣는 듯했다. 단종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가온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불안했지만,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가온… 네가… 네가 곁에 있어주지 않는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단종의 목소리는 다시 얇아졌다. 그는 가온을 올려다보며, 마치 어린아이처럼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가온은 그런 단종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단종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의 곁을 지키며, 그의 폭주를 막고, 그의 상처를 보듬어 줄 것이었다.

“저는… 폐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나… 폐하 곁에 있을 것입니다.”

가온의 말은 단순했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약속이 담겨 있었다. 단종은 가온의 말을 듣고, 안심한 듯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는 가온의 품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이전과는 다른, 조금은 편안해 보이는 자세였다.

“가온… 내 머리가… 너무 아파. 모두가 나에게… 욕하는 것 같아.”

단종의 목소리는 다시 어린아이처럼 나른해졌다. 그는 가온의 품에 파고들며, 마치 따뜻한 털뭉치에 안긴 강아지처럼 행동했다. 가온은 그런 단종을 보며,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제… 편히 쉬십시오, 폐하. 모든 것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가온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단종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숨겨져 있었다. 그녀는 단종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잔혹한 선택을 해야 했다. 왕위를 탐하는 자들을 향한 그녀의 냉철한 눈빛은, 단종의 어둠을 잠재우는 동시에, 또 다른 어둠을 불러올지도 몰랐다.

궁궐의 복도는 여전히 차가웠고, 불길한 속삭임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단종의 곁에는 가온이 있었다. 어린 왕의 유일한 믿음, 그의 어둠을 잠재우는 유일한 존재. 가온의 헌신적인 노력과 진심 어린 위로가 단종의 얼어붙었던 마음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파고드는 잔잔한 물결이 아닌, 거대한 폭풍의 전조일지도 몰랐다.

서화는 단종의 침전 문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그녀의 눈에는 질투와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단종의 곁에 서 있는 가온의 모습이 그녀의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

‘저 계집… 감히 폐하 곁에…’

서화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단종이 자신만을 바라봐야 한다고 믿었다. 단종의 곁에 있는 모든 여자는, 그녀의 적이었다. 특히 가온. 그녀는 가온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가온… 폐하께서는… 너를 믿지 않으신다.”

서화는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단종의 불신을 이용해, 가온을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가온은 서화의 말에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단종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폐하께서는… 저를 믿으십니다.”

가온의 단호한 대답에 서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단종의 곁을 지키는 가온의 모습은, 마치 굳건한 바위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그날 밤, 단종은 가온의 품에 안겨 깊은 잠에 빠졌다. 그의 얼굴에는 어린아이 같은 평온함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의 꿈속에서는, 여전히 왕위 찬탈을 노리는 수많은 그림자들이 춤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들 사이에는, 잔혹한 야욕을 드러내는 수양대군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가온은 잠든 단종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의 눈빛은 깊고 어두웠다. 단종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어떤 어둠과도 맞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왕위가 뭐라고, 그깟 왕위 때문에 어린 왕의 마음이 부서지는 것을, 그녀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헌신이, 과연 단종을 구원할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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