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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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했던 어린 단종, 왕위에 오르다. 세상은 그를 무시한다. 단종은 수양대군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했다. 그러다 수양대군의 딸, 가온을 만났다. 그와 동시에 서화는 단종을 보고 단종의 옆자리가 무조건 자신이라는 멍청한 생각을 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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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은 여전히 따스했으나, 어린 왕의 마음은 어느덧 차갑게 식어갔다. 열두 해 남짓한 어린 나이에 덜컥 올라앉은 보좌는, 옥좌라기보다 얼음 조각 같았다. 갓 피어난 꽃잎처럼 여렸던 단종의 눈빛에는 어느새 세상에 대한 불신이 짙게 드리워졌다. 곁에는 헐떡이며 왕위를 넘보는 이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그림자는 수양대군이었다. 삼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지만, 그 입술에서 뱉어지는 말들은 언제나 칼날 같았다.

“세상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전하.”

어느 날, 수양대군이 뼈를 깎는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직했지만, 그 울림은 궁궐의 기둥을 흔드는 듯했다. 단종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실은 ‘믿음’이라는 단어를 비웃기라도 하듯 잔혹했다. 정사를 논하는 신하들의 입에서는 칭찬 대신 험담이, 충언 대신 아첨이 흘러나왔다. 그들의 눈빛은 어린 왕을 향한 것이 아니라, 왕좌 너머의 허공을 향해 있었다. 모두가 왕위를 탐했고, 모두가 단종을 짓밟고 일어서려 했다.

“전하, 저들의 혓바닥은 독사 같습니다. 섣불리 믿으셨다가는 끔찍한 화를 당하실 것입니다.”

그때, 낯선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낭랑했지만, 그 안에는 묘한 냉철함이 서려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붉은 치마를 곱게 차려입은 소녀가 서 있었다. 앳된 얼굴이었지만, 그 눈빛은 또래의 아이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는 세상의 온갖 번잡함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수양대군의 딸, 가온이었다.

가온은 단종에게 있어 낯선 존재였다. 늘 경계해야 할 대상들로 가득 찬 궁궐에서, 그녀는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같았다. 그녀의 말은 날카로운 충고가 아니라, 얼어붙은 마음에 닿는 한 줄기 바람 같았다. 단종은 가온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다른 이들의 말에서 느껴지는 탐욕이나 거짓이 없었다. 오직 진실만이 담겨 있는 듯했다.

“가온, 네 말은… 듣기 좋구나.”

단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온은 담담한 표정으로 단종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단종의 곁에서, 왕으로서의 위엄보다는 한 명의 어린 소년으로서의 외로움을 읽어낸 듯했다.

“전하의 곁에는, 오직 진실만을 말하는 이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전하의 마음은 썩어 문드러질 것입니다.”

가온의 말은 단종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 그는 가온을 통해 처음으로 ‘믿음’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되새기게 되었다. 세상이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려 할 때, 가온은 그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유일한 존재였다.

한편, 단종의 곁에는 또 다른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서화였다. 그녀는 단종을 바라보며, 자신의 운명이 단종과 얽혀 있다고 착각했다. 어린 왕의 앳된 얼굴, 그 고독한 눈빛에 매료된 그녀는, 자신이 단종의 곁에 있어야 할 유일한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전하, 저에게는 전하의 곁이 당연합니다. 저 말고 누가 전하를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서화는 단종의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애틋함이 가득했지만, 그 안에는 소유욕과 질투심이 뒤섞여 있었다. 단종은 서화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서화의 애틋한 눈빛 속에서, 자신을 향한 진심 어린 마음을 읽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이미 가온의 말이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화 아가씨, 전하의 곁은… 그리 쉬운 자리가 아닙니다.”

가온이 차가운 목소리로 서화에게 말했다. 그녀의 눈빛은 서화의 착각을 꿰뚫어 보듯 날카로웠다. 서화는 가온의 말에 발끈하며 단종에게 매달렸다.

“전하, 저 아이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저 아이는… 전하의 곁을 탐하는 자입니다.”

단종은 서화의 격앙된 목소리에 당황했다. 그는 두 여인의 상반된 모습에 혼란스러웠다. 가온의 냉철함과 서화의 열정. 어느 쪽이 진실인지, 그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이미 가온에게 기울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고, 그녀의 눈빛에는 탐욕이 없었다.

해가 지고, 달이 떠올랐다. 단종은 홀로 편전에 앉아 있었다. 촛불은 희미하게 흔들렸고, 그의 얼굴 위로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는 수양대군의 차가운 눈빛, 신하들의 아첨하는 웃음, 그리고 서화의 집착 어린 시선을 떠올렸다. 세상은 온통 자신을 향한 칼날 같았다.

그때, 문밖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인기척이었다. 단종은 긴장했다. 또 어떤 낯선 얼굴이 자신을 괴롭히려 오는 것일까. 하지만 곧이어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그는 안도감을 느꼈다.

“전하, 주무시고 계십니까?”

가온이었다. 그녀는 붉은 치마를 곱게 차려입고, 촛불 아래 서 있었다. 단종은 무심코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단종은 위안을 느꼈다.

“가온아… 어찌 이곳에 왔느냐?”

단종이 나지막이 물었다. 가온은 천천히 단종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발걸음은 소리 없이 조용했다.

“전하께서 홀로 계실까 염려되어 왔습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잠시라도 쉬셔야지요.”

가온은 단종의 앞에 놓인 서책을 덮어주었다. 그녀의 손길은 부드러웠고, 따뜻했다. 단종은 그녀의 손길에 닿은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따뜻한 것이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세상이… 무섭다, 가온아.”

단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그의 눈빛에는 어린아이의 순수함이 가득했다. 가온은 단종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녀의 손길은 마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햇살 같았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전하. 제가 있지 않습니까.”

가온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그 안에는 단종을 향한 굳건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단종의 귓가에 속삭였다.

“전하는… 이 세상의 빛이십니다. 그 빛을 잃지 마십시오.”

그때, 문밖에서 서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저 왔어요! 얼른 문 열어주세요!”

서화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단종은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가온은 그런 단종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전하, 잠시 저 아이를 상대하십시오. 저는… 곧 다시 오겠습니다.”

가온은 단종의 곁을 떠나, 조용히 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녀의 뒷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단종은 가온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을 되새겼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전하. 제가 있지 않습니까.’

문밖에서 서화의 다급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전하! 왜 문을 안 여세요! 저, 전하를 보러 왔다고요!”

단종은 심호흡을 하고, 서화에게 말했다.

“서화, 지금은… 늦었다. 내일 다시 오거라.”

서화는 단종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이내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 아이가… 전하 곁에 있었습니까?”

서화의 목소리에는 질투심이 가득했다. 단종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가온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촛불은 여전히 희미하게 흔들렸고, 궁궐의 밤은 깊어갔다. 어린 왕의 마음속에는, 세상에 대한 불신과 더불어, 가온이라는 이름의 작은 희망이 싹트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앞으로 다가올 폭풍 속에서 그를 지탱해 줄 유일한 빛이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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