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마지막 임무의 시작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과거를 숨긴 채, 마지막 임무를 맡은 킬러 데싱. 은퇴 후 평화로운 삶을 꿈꾸며 의뢰인 최민준을 만난다. 하지만 최민준의 수상한 태도와 킬러 업계의 불안한 기류는 그의 마지막 임무가 순탄치 않으리라 예감케 한다.
나는 킬러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과거는, 마치 꿈처럼 아득했다. 낡은 서류 더미에 파묻혀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가락은 이제 날카로운 칼날을 쥐는 데 익숙해졌고, 찌개 백반에 소주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던 소소한 행복은, 성공적인 임무를 완수하고 두둑해진 지갑으로 대체되었다. 이름은 데싱. 겉보기엔 능글맞고 허당스러운, 세상 물정 모르는 백수 같아 보였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일을 해내는, 뭐, 나름 베테랑 킬러였다. 돈을 밝히는 속물인 척했지만, 사실 속정은 깊었다. 깊어도 너무 깊어서, 어쩌면 그게 킬러로서의 수명에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고, 가끔씩 스스로를 다독이곤 했다.
“자, 마지막 임무입니다.”
묵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낡은 가죽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건너편에 앉은 의뢰인을 쏘아보았다. 레시스턴. 겉으로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유능해 보이는, 하지만 속을 알 수 없는 남자. 돈과 정보를 이용해 사람들을 조종하는 것을 즐긴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아니,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와 거래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말했다.
“이번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면, 저는 은퇴입니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은퇴. 두 글자가 주는 무게감이 남달랐다. 빌라 사채업자들에게 쫓기던 날들을 끝내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사는 것. 그게 내 오랜 꿈이었다. 매일 아침, 신선한 빵 냄새를 맡으며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따뜻한 햇살 아래 책을 읽는 삶. 그 상상만으로도 가슴 벅찼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레시스턴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데싱 씨.”
그의 눈빛은 마치 깊은 호수 같았다. 겉으로는 잔잔해 보였지만, 그 아래에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어쩐지, 이번 임무는 뭔가 좀 다르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번 목표물은… 박영희입니다.”
순간, 숨을 멈췄다. 박영희. 과거 라이벌이었던 여자. 냉철하고 실력 있는 킬러. 그녀와 나는 늘 쫓고 쫓기는 관계였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실력을 갈고 닦았고, 때로는 목숨을 걸고 싸우기도 했다. 그녀를 떠올리니, 잊고 있던 과거의 감정들이 불현듯 되살아나는 듯했다.
“박영희라니… 너무한 거 아니오?”
애써 태연한 척 말을 내뱉었지만,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레시스턴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데싱 씨에게는 쉬운 임무일 겁니다. 물론, 박영희 씨에게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이번 임무는 단순히 제거하는 것 이상입니다.”
그가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 봉투를 밀었다. 봉투 안에는 사진 한 장과 함께, 박영희의 동선이 담긴 정보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사진 속 박영희는, 지금껏 내가 알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은 여전했지만, 그 안에 담긴 슬픔은 무엇이었을까.
“박영희 씨는… 곧 엄청난 비밀을 가진 물건을 넘겨받게 됩니다. 그 물건을 손에 넣기 전에, 그녀를… ‘없애야’ 합니다.”
‘없애야 한다’는 말에 묘한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단순한 제거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레시스턴은 말을 이었다.
“그 물건은… 세상의 판도를 뒤흔들 만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물건이 잘못된 손에 들어가면… 곤란해집니다. 물론, 데싱 씨도 곤란해지겠죠.”
그의 말은 마치 나를 떠보는 듯했다. 그는 내가 이 임무를 수락할지, 거절할지, 아니면 다른 수를 쓸지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박영희를 죽이라고?”
“죽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제거’하라고 했죠. 방법은 데싱 씨의 재량에 맡기겠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물건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그는 다시금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그의 손짓 하나하나에, 마치 거대한 음모가 숨겨져 있는 듯했다.
“그 물건은… 킬러들의 세계에서도 상당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마… 블랙 길드에서도 움직일 겁니다.”
블랙 길드. 킬러들의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가장 위험한 조직. 그들이 움직인다면, 이번 임무는 더욱 복잡해질 터였다.
“알겠소.”
결국,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은퇴를 앞두고, 이런 거대한 사건에 휘말릴 줄이야. 씁쓸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럼, 제 몫은 단단히 챙겨야겠지.”
레시스턴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이 정도 위험 부담이라면, 데싱 씨가 원하는 만큼 드리겠습니다.”
그의 말에, 씁쓸함 속에 묘한 희망이 피어올랐다. 마지막 임무. 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다면, 나는 정말로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 날, 나는 박영희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으로 향했다. 낡은 트렌치코트 안에는, 늘 함께하는 칼과 총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녀는 오늘 밤, 어떤 거래를 할 예정이었다. 그 거래를 막고, 물건을 확보해야 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밤거리. 네온사인 불빛이 빗물에 번져 아른거렸다. 나는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몸을 숨기고, 박영희의 등장을 기다렸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경계하며 나타났다.
“왔군.”
나직이 읊조렸다. 그녀는 분명히 내 존재를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빠른 걸음으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대로는 안 된다.’
나는 그녀를 쫓아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좁은 골목길은 순식간에 나의 사냥터로 변했다. 그녀의 날렵한 움직임은 여전히 위협적이었지만, 나는 그녀의 움직임을 읽고 빈틈을 파고들었다.
“데싱…! 네가 왜 여기에…?”
그녀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마치 춤을 추듯, 서로의 공격을 피하고 받아내며 격렬하게 싸웠다. 낡은 건물들의 벽에 부딪히는 소리, 칼날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밤의 정적을 갈랐다.
“마지막 임무다, 박영희.”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당황함과 함께, 묘한 동정심이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순간, 나는 그녀의 뒤에서 나타난 그림자를 보았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 그의 손에는 날카로운 칼이 들려 있었다.
‘블랙 길드…?’
나는 본능적으로 박영희를 밀쳐냈다. 칼날이 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차가운 통증과 함께, 피가 솟구쳤다.
“젠장…!”
나는 박영희를 향해 소리쳤다.
“도망쳐! 그 물건은… 네가 아니어도 돼!”
하지만 그녀는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옆으로 다가와 나와 함께 검은 그림자를 마주했다. 그녀의 눈빛은 어느새 다시 날카로워져 있었다.
“이대로 도망칠 수는 없어.”
그녀의 말에, 나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어쩌면, 그녀도 나와 같은 마음일지도 모른다고.
“좋아. 그럼, 함께 끝내자.”
우리는 다시 한번, 검은 그림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빗줄기가 거세지기 시작했다. 어둠과 비, 그리고 칼날이 뒤섞여, 마지막 임무의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
레시스턴의 수상한 태도, 블랙 길드의 등장, 그리고 박영희와의 예상치 못한 협력. 모든 것이 꼬이기 시작했다. 내 은퇴는 과연 순탄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아니면, 이 마지막 임무가 나의 마지막이 될까.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고, 나의 심장 또한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