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추억의 조각, 드러나는 진실
편지로 인해 삐걱거리던 친구들은 묻어두었던 과거의 비밀과 얽히고설킨 감정들을 끄집어내며 서로를 몰아붙인다. 10년 전 그날 밤, 각자 숨겨왔던 진실의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하며 예상치 못한 코믹한 상황들이 연출된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귓가를 스치자, 민준은 무의식적으로 코트 깃을 여몄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건만, 마지막 눈이 내리던 그날의 기억은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아니, 어쩌면 편지가 도착한 이후로는 더욱 생생하게 그의 뇌리를 파고들고 있었다. 낡은 기차역,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흩날리던 눈발, 그리고… 준수의 텅 빈 자리.
“정말… 이걸 다 기억하고 있는 거야?”
민준의 물음에 태현이 픽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에는 씁쓸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기억력 하나는 타고났거든. 특히, 엿 같은 기억들은.”
태현의 말에 민준은 입을 다물었다. 편지를 받은 후, 그들은 마치 낡은 사진첩을 펼쳐보듯 서로의 과거를 들춰내고 있었다. 아니, 들춰내고 있다는 표현보다는 뜯어내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몰랐다. 서로의 약점, 숨겨왔던 비밀, 그리고 엇갈린 감정들이 날카로운 조각이 되어 서로를 향했다.
“그래, 기억나. 네가 준수한테 돈 빌려줬던 날.”
민준이 툭 던지자, 태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편지에는 태현이 준수에게 돈을 빌려주고 받지 못해 속상해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별거 아닌 일이라 생각했는데, 편지는 그 사소한 일조차 그의 알리바이를 흔드는 결정적인 증거처럼 포장해 놓았다.
“그게 왜? 나중에 돌려받을 거라고 믿었으니까.”
“믿었을 수도 있지. 그런데 그날 밤, 준수가 너한테 ‘이 돈, 꼭 갚을게. 아니면….’ 하고 말했던 거, 기억 안 나?”
민준의 목소리에는 묘한 추궁의 기색이 묻어났다. 태현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랬던가? 글쎄…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가물가물? 아니, 너 분명히 기억하고 있잖아. 준수가 얼마나 다급해 보였는지, 너도 그걸 알고 있었으면서.”
태현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의 표정에는 당황함과 약간의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그래, 기억난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야. 그날 밤, 나는… 나는 준수랑 같이 있었어.”
“뭐라고?”
민준과 서연, 유진이 동시에 외쳤다. 태현이 준수와 함께 있었다니. 그건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실이었다.
“말도 안 돼. 너 그날 밤, 편의점에서 일한다고 하지 않았어?”
유진이 발끈하며 물었다. 편지에는 태현이 그날 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의 알리바이를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였다.
“알바? 아, 그거… 잠깐 빠져나왔었어. 준수가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해서.”
태현은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할 말? 무슨 할 말?”
서연의 질문에 태현은 고개를 떨궜다.
“그게… 준수가 나한테… 뭔가 부탁할 게 있다고 했어. 아주… 중요한 거라고.”
“중요한 부탁? 뭔데?”
민준이 재촉했다. 태현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준수가… 사라지기 전에, 나한테… ‘만약에 내가 없어지면, 내 방에 있는 일기장, 꼭 태워버려 줘.’ 라고 말했어.”
“뭐?”
순간, 카페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10년 동안 묻어두었던, 아니 묻으려고 애썼던 과거의 파편들이 제대로 된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했다.
“일기장? 준수가 왜 그런 말을…?”
서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몰라. 그냥… 너무 불안해 보였어. 마치…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처럼.”
그때, 민준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번쩍 스쳤다. 사라지기 전날 밤, 준수와 크게 다투고 그를 밀쳤던 기억. 그리고 그날, 준수가 건네주려다 실패했던 무언가.
‘설마… 그게 일기장이었나?’
민준은 자신의 기억을 되짚었다. 준수는 분명 무언가를 건네주려 했다. 하지만 그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준수를 뿌리치고 도망쳤다.
‘내가… 내가 준수를 밀쳤어. 그리고… 그리고 무언가를 받지 못했어.’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태현은 그런 민준을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준수의 부탁대로, 그날 밤 준수의 방에 갔었어.”
“뭐라고? 준수 방에 갔다고?”
서연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태현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런데… 일기장은 없었어. 대신… 창문이 열려 있었고….”
태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창문…?”
“그래. 창문이 열려 있었어. 그리고… 밖으로 이어지는 발자국이….”
태현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빛에는 10년 전의 공포와 후회가 뒤섞여 있었다.
“발자국…?”
유진이 숨을 죽였다.
“그래. 눈 위에 찍힌 발자국. 그런데… 그게… 이상했어.”
“이상하다니?”
민준이 물었다.
“발자국이… 한 명의 것이 아니었어. 두 명… 아니, 세 명의 발자국이 뒤섞여 있었어. 마치… 누군가를 끌고 가는 듯한….”
태현의 말에 모두들 경악했다. 10년 전, 그들은 준수가 홀로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현의 증언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준수가… 누군가에게 끌려갔다는 거야?”
서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모르겠어. 하지만… 분명히 봤어. 눈 위에 뒤섞인 발자국들을.”
그때, 민준이 불쑥 외쳤다.
“아니야! 준수는… 준수는 그런 식으로 사라질 사람이 아니야!”
민준의 말에 모두들 민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광기에 가까운 집착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래, 준수는… 나한테 할 말이 있었어. 나한테… 무언가를 보여주려고 했고.”
민준은 이를 악물었다.
“내가… 내가 그걸 보지 못했어. 내가… 내가 준수를 밀쳤어. 그래서… 그래서 준수가….”
“민준아…”
서연이 민준의 팔을 잡으려 했지만, 민준은 뿌리쳤다.
“아니! 나는… 나는 준수를 잃은 것이 아니야. 내가… 내가 준수를 망친 거야!”
민준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쨍그랑, 컵이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진정해, 민준아.”
태현이 민준의 어깨를 잡았다.
“너 때문이 아니야. 아무도… 아무도 네 탓을 하지 않아.”
“하지만… 내가 준수를 밀쳤어! 그리고… 그리고 그날 밤, 준수가 나에게 무언가를 주려고 했었어!”
민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무언가…?”
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 무언가… 작은 상자였던 것 같아. 그런데… 내가… 내가 뿌리치는 바람에….”
민준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기억 속, 준수가 건네주려 했던 작은 상자. 그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혹시… 혹시 그 상자… 어떤 모양이었는지 기억나?”
유진이 물었다. 민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무 순식간이라… 기억이 잘 안 나.”
“하지만… 준수가 너한테 뭔가 주려고 했다는 건 확실하구나.”
태현이 말했다.
“그래. 그래서… 나는… 준수가 사라진 그날 밤, 준수의 방에 갔었어.”
“뭐라고?”
이번에는 태현이 놀랄 차례였다.
“나도… 준수의 방에 갔었어. 준수가 나한테… 보여줄 것이 있다고 했거든. 그런데…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무도 없었어.”
“아무도 없었다고?”
서연이 물었다.
“그래. 그런데… 책상 위에… 뭔가 떨어진 흔적이 있었어. 작은… 종이 조각이었는데….”
민준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종이 조각…?”
“그래. 거기에… 희미하게… ‘서연’이라고 적혀 있었어.”
“나라고…?”
서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래. 그래서 나는… 준수가 너한테 뭔가 보여주려 했던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민준은 서연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 나는… 준수가 사라진 날 밤… 준수를 만났어.”
서연의 고백에 모두들 숨을 죽였다.
“만났다고?”
태현이 물었다.
“그래. 준수가… 나한테… 편지를 써 달라고 했어.”
“편지?”
“응. 나한테… ‘이 편지를, 민준이한테 전해주되, 절대 민준이한테 직접 주지 말고….’ 라고 말했어.”
서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는… 민준이한테 그 편지를 전해주려고 했어. 그런데… 그날 밤, 민준이가… 나한테… ‘너도 준수랑 같이 있었지?’ 라고 물었어. 그래서… 그래서 나는…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 했어.”
“너… 너도 준수랑 같이 있었어?”
민준은 서연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준수가… 나한테… ‘내 비밀을… 너한테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라고 했어. 그래서… 그래서 나는… 준수의 비밀을… 듣게 되었어.”
“비밀…?”
모두들 서연의 입에서 나올 진실을 기다렸다. 서연은 심호흡을 했다.
“준수는… 사실… 돈 때문에…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어. 아주… 거액의 돈이었어.”
“돈…?”
태현이 되물었다.
“그래. 준수가… 몇 달 전부터… 도박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 그런데…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서연의 말에 태현은 고개를 떨궜다.
“내가… 내가 준수한테 빌려준 돈… 그것 때문이었나?”
“아니, 태현아. 그것과는… 다른 것 같아.”
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준수가 말하길… 자신이… ‘그것’을 건드리는 바람에… 큰 빚을 졌다고 했어. 그리고… 그것 때문에…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것…?”
유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준수는… ‘그것’이 무엇인지… 나한테는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어. 하지만… 분명히 말했어. ‘이것 때문에, 나는… 영원히 사라져야 할지도 몰라.’ 라고.”
서연은 눈물을 삼켰다.
“그래서… 그래서 나는… 준수의 부탁대로… 민준이한테… 편지를 전해주려고 했어. 하지만… 민준이가 나를… 너무 차갑게 쳐다봐서… 무서웠어. 그래서… 준수의 편지를… 태워버렸어.”
“뭐라고? 편지를… 태웠다고?”
민준이 경악했다.
“그래… 미안해, 민준아… 나도… 나도 너무 무서웠어. 준수가… 준수가 사라진 후… 내가 준수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이… 들통날까 봐….”
서연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준수가 왜… 나한테 편지를 써달라고 했을까? 그리고… 왜… 민준이한테… 직접 주지 말라고 했을까?”
유진이 의문을 제기했다.
“몰라… 하지만… 준수가 사라지기 전에… 나한테… ‘만약 내가 사라지면… 너희들이라도… 행복해야 해.’ 라고 말했어.”
서연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행복…?”
그때, 유진이 문득 떠오른 듯 소리쳤다.
“잠깐만! 나도… 나도 준수랑 같이 있었어!”
“뭐라고?”
모두들 유진을 바라보았다.
“나도… 준수가 사라지기 전날 밤… 준수한테…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만났어.”
유진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할 말…? 무슨 할 말?”
태현이 물었다.
“그게… 사실… 나도… 준수한테… 돈을 빌려줬었거든.”
“뭐라고?”
민준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유진을 쳐다보았다.
“응… 얼마 안 되는 돈이었어. 준수가… 급해서… 나한테 부탁했거든.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던 용돈을… 다 줬어.”
“그래서… 그 돈은… 돌려받았고?”
민준이 물었다.
“아니… 아직….”
유진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나는… 준수가 돈 때문에 힘들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래서… 준수한테… ‘이 돈은… 급할 때만 쓰고… 절대… 나쁜 짓은 하지 마.’ 라고 말했어.”
“나쁜 짓…?”
“그래… 준수가… 뭔가… 위험한 일을 하려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거든.”
유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나는… 준수한테… ‘만약에… 뭔가 잘못될 것 같으면… 나한테… 꼭 말해 줘.’ 라고 했어.”
“그래서… 준수가 뭐라고 했어?”
서연이 물었다.
“준수는… 대답이 없었어. 그냥… 나를 쳐다보면서… ‘고마워, 유진아.’ 라고 말했어. 그리고… 나한테… ‘어쩌면… 나도… 너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지도 몰라.’ 라고 했어.”
유진은 눈물을 글썽였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고…?”
그때, 민준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다시 번쩍였다. 준수가 자신에게 건네주려 했던 작은 상자.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었을지도 모를, 준수의 진심.
‘어쩌면… 준수는… 나한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
민준은 이를 악물었다.
“나는… 준수가 사라진 후… 준수의 방에 갔었어.”
모두들 민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책상 위에… 종이 조각이 있었어. 거기에… ‘서연’이라고 적혀 있었지.”
민준은 서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너를 의심하지 않았어. 오히려… 서연이가… 준수한테… 뭔가 중요한 것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나… 나는… 아무것도 몰라.”
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
민준은 단호하게 말했다.
“너는… 알고 있었지. 준수가… 돈 때문에… 위험한 일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민준아…!”
서연이 민준을 말리려 했지만, 민준은 말을 이었다.
“편지에는… 너의 알리바이에… 허점이 적혀 있었어. 너는… 그날 밤… 준수와 함께 있었던 것을… 숨기고 있었지.”
“그래… 맞아…”
서연은 결국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나는… 준수의 비밀을… 말할 수 없었어. 준수가… 나한테… ‘이 비밀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줘. 특히… 민준이한테는….’ 이라고 말했거든.”
“내가… 내가… 준수한테… 그렇게… 무서운 존재였던 거야?”
민준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니야, 민준아!”
서연은 민준의 손을 잡았다.
“준수는… 너를… 믿고 있었어. 너한테…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어 했어. 그런데… 네가… 너무… 화가 나 보여서… 말하지 못했던 거야.”
“화가…?”
“그래… 너는… 준수가… 돈 때문에… 위험한 일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잖아.”
서연의 말에 민준은 충격을 받은 듯 입을 다물었다.
“그래…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준수가… 그렇게까지… 깊이 빠져들 줄은… 몰랐어.”
민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준수는… 나한테… ‘이 돈… 꼭 갚을게. 아니면….’ 이라고 말했었어. 그리고… 그 뒤에… 무언가를 더 말하려 했었는데… 내가… 내가 뿌리치는 바람에….”
“그 뒤에… 뭐라고 말하려 했었지?”
태현이 물었다.
“글쎄… 기억이 나지 않아. 하지만… 분명히… 무언가… 중요한 말이었을 거야.”
민준은 고개를 떨궜다.
“결국… 우리는… 모두… 준수의 진심을… 외면했던 거네.”
유진이 씁쓸하게 말했다.
“그래… 우리는… 모두… 각자의 상처와… 비밀 때문에… 준수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던 거야.”
서연이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야 해.”
태현이 말했다.
“그래… 우리는… 이제라도… 진실을… 마주해야 해.”
민준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10년 전 마지막 눈이 내리던 날, 흩어졌던 추억의 조각들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조각들이 맞춰지면서, 10년 동안 묻어두었던 슬프고도 가슴 아픈 진실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