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눈 내리던 날, 사라진 친구
10년 전 마지막 눈이 내리던 날, 마을의 상징인 낡은 기차역에서 고등학생 준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사건은 그렇게 묻히는 듯했다. 시간은 흘러 10년 후, 모두가 잊고 싶었던 과거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
열두 살, 잊지 못할 그 겨울의 풍경이 있었다. 마을 어귀를 굽이쳐 흐르던 강물마저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던 매서운 추위. 하얀 눈송이가 솜이불처럼 세상을 뒤덮던 그날, 우리는 열다섯 살이었다. 낡은 기차역, 삐걱대는 나무 의자에 앉아 콧김을 뿜으며 덜덜 떨던 우리의 모습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붉은 벽돌 담벼락에 새겨진 낡은 시계는 이미 멈춘 지 오래였지만, 그 시계탑 아래서 우리는 영원할 것처럼 웃고 떠들었다.
“야, 민준아! 너 또 늦었냐?”
태현이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녀석은 늘 그랬다. 툭툭 내뱉는 말 속에 숨겨진 진심은 엿 보기 힘들 정도로 시니컬했다. 나는 헉헉거리며 녀석들의 품으로 달려갔다.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붕어빵 봉지가 들려 있었다.
“아, 미안. 엄마가 붕어빵 사준다고 붙잡아서.”
“흥, 핑계는. 너 분명히 어제 준수랑 밤새 게임하다가 늦잠 잔 거지?”
유진이가 얄궂게 웃으며 붕어빵 봉지를 낚아챘다. 녀석은 언제나 분위기 메이커였다. 톡톡 터지는 웃음소리가 녀석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아니거든! 어제는… 어제는… 준수랑 좀 할 얘기가 있어서.”
순간, 녀석들의 눈빛이 묘하게 흔들렸다. 준수.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 녀석은 늘 말이 많았고, 웃음이 많았다. 별것 아닌 일에도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순수한 녀석. 하지만 어쩐지 그날따라 녀석의 눈빛은 어두웠다.
“할 얘기? 뭔 얘기?”
서연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녀석은 늘 그랬다. 차분하고, 다정하고, 우리의 감정을 먼저 살피는 아이. 녀석의 목소리에는 늘 따뜻함이 묻어났다.
“그게… 뭐, 별거 아니야. 그냥… 좀 서운한 게 있어서.”
나는 억지로 웃으며 붕어빵을 하나 입에 물었다. 달콤한 팥앙금이 입안 가득 퍼졌지만, 왠지 모르게 씁쓸한 맛이 혀끝을 맴돌았다. 준수는 말이 없었다. 녀석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만이 걸려 있을 뿐, 그 속내를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우리 중에 제일 먼저 어른이 될 것 같은 애가 너야, 준수야.”
유진이가 녀석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맞아. 너처럼 침착하고 어른스러운 애가 또 있을까.”
태현이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늘 우리들의 중심이었다. 녀석이 없으면 우리는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얘들아, 나 잠깐만….”
그때, 준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녀석은 왠지 모르게 초조해 보였다. 손목시계를 몇 번이고 확인하더니,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금방 올게.”
준수는 그렇게 낡은 기차역을 나섰다. 붉은 벽돌 담벼락을 따라 걸어가는 녀석의 뒷모습이 유난히 작아 보였다. 우리는 녀석이 돌아올 거라고, 당연히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열다섯 번째 겨울은 영원할 거라고,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날 밤, 준수는 돌아오지 않았다.
마지막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날의 눈을 기억했다. 펑펑 쏟아지던 눈, 앙상한 나뭇가지에 쌓여 있던 하얀 눈꽃, 그리고 텅 비어버린 기차역.
시간은 마치 멈춰버린 기차처럼 흘렀다.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어른이 되었고, 흩어졌고, 각자의 삶을 살았다. 잊고 싶었던 기억, 묻어두었던 상처들은 시간이라는 마법에 의해 희미해지는 듯했다.
“김민준 씨.”
낯선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카페 안은 손님들로 북적였지만, 그 목소리가 마치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낡은 안경을 쓴 남자가 나를 향해 씩 웃고 있었다.
“혹시… 최태현 씨?”
“오, 알아보시다니. 영광입니다. 10년 만인데도 알아보시다니.”
태현이는 껄껄 웃으며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녀석은 예전보다 훨씬 더 무뚝뚝해진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더 깊어진 눈빛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여기서?”
“글쎄요. 우연의 일치라고 해야 할까요?”
우리의 대화는 어색했다. 10년이라는 시간은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세워 놓은 듯했다. 그때, 카페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서연이었다. 녀석은 예전보다 더 차분해 보였고, 아름다워졌다. 하지만 그 눈빛 깊은 곳에는 왠지 모를 슬픔이 자리하고 있는 듯했다.
“서연아!”
유진이가 녀석을 향해 달려갔다. 녀석은 여전히 밝고 명랑해 보였지만, 그 밝음 속에 숨겨진 불안감이 엿보였다.
“너도 여기 있었어?”
“응. 나도 태현이랑 약속 있었거든.”
우리는 그렇게, 10년 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잊고 싶었던 과거, 묻어두었던 진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근데… 우리 왜 모인 거지?”
유진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게 말이야. 10년 만에 갑자기 이렇게 보자고 한 이유가 뭐야, 태현아?”
내가 녀석에게 물었다. 태현이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다들 편지 받았어?”
편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편지?”
“나도 안 받았는데.”
“나도.”
태현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네. 나만 받은 줄 알았는데.”
“뭔데 그래, 태현아. 어서 말해봐.”
서연이가 녀석을 재촉했다. 태현이는 주머니에서 구겨진 편지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발신인 불명. 낡은 종이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무언가 적혀 있었다.
“이게 뭔데?”
유진이가 편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뭐야? ‘너의 알리바이는 완벽하지 않았다’라니.”
“내 것도 똑같아.”
태현이가 말했다.
“‘그날 밤, 너는 혼자가 아니었다’.”
서연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 편지에는… ‘네가 본 것은 진실이 아니다’라고 적혀 있었어.”
나는 내 편지를 꺼내 읽었다.
‘너는 준수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그날 밤, 너의 침묵은 죄가 되었다.’
우리는 서로의 편지를 훑어보았다. 낯선 글씨체였지만, 그 안에는 10년 전 그날 밤, 우리가 각자 숨기고 있었던 진실의 조각들이 담겨 있었다.
“이거… 누가 보낸 거지?”
유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군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던 거야.”
태현이가 씁쓸하게 말했다.
“아니면… 10년 전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알고 있는 누군가.”
서연이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설마… 준수?”
나도 모르게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10년 전,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버린 친구. 녀석은 어디에 있는 걸까. 아니, 녀석은 아직 살아 있는 걸까.
“말도 안 돼. 준수가 살아있다면… 왜 편지를 보낸 거지?”
유진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편지의 내용… 전부 사실이야?”
태현이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나는 침묵했다. 녀석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10년 전 그날 밤, 나는 준수와 크게 다투었고, 녀석을 밀쳤다. 녀석이 사라지기 전날 밤이었다.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녀석의 실종과 관련된 모든 기억을 묻어버리려 애썼다.
“민준아?”
서연이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거 아니야. 그냥… 좀 서운한 게 있어서.”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폭풍전야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편지는 마치 낡은 상처를 헤집는 메스처럼, 잊고 싶었던 기억들을 다시 끄집어냈다.
“이 편지들… 전부 준수가 사라지던 날 밤에 대한 거잖아.”
유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가… 우리 중에 범인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거야.”
태현이의 말이 차갑게 카페 안을 울렸다. 우리는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던 관계 속에 숨겨져 있던 균열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엇갈린 감정, 묻어두었던 비밀, 그리고… 사라진 친구.
그날 밤, 낡은 기차역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0년 전 마지막 눈이 내리던 날, 우리는 무엇을 놓쳤던 걸까. 낯선 편지 한 통으로 인해, 우리의 잊혀진 과거가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과거의 진실과 마주해야만 했다. 씁쓸한 붕어빵 맛처럼, 입안 가득 퍼지는 후회와 불안감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