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수상한 협력

K는 J의 연구를 방해하는 듯 보이지만, 그의 행동 뒤에는 숨겨진 의도가 있다. J를 돕기 위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접근하는 K. 겉으로는 으르렁대면서도, 함께 편지의 비밀을 파헤치며 서로에게 묘한 끌림을 느끼기 시작한다. 설렘과 긴장의 동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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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수상한 협력

미스터리박사 J, 아니 연서의 주인공을 향한 핑크빛 망상에 사로잡힌 지은은 연구실 책상에 엎드려 끙끙거렸다. 고대 토기 파편에서 발견된 낡은 편지. 잉크는 바랬지만, 그 안에 담긴 절절한 마음은 마치 방금 쓴 듯 생생했다. “나의 별, 나의 달… 당신을 향한 이 마음이 영원히 시들지 않기를…” 아, 이런 감성이라니! 지은은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분명 자신과 같은 시대, 아니, 어쩌면 같은 연구실에 있을지도 모를 운명의 상대!

“뭐야, 또 넋 놓고 있어?”

차가운 목소리에 지은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얄미운 라이벌, 미스터리박사 K, 본명 강민준이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지은을 내려다보며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박사님이야말로 뭘 그렇게 뚫어져라 보시는 건데요?”

지은은 재빨리 편지 파편을 품속으로 숨기며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민준은 피식 웃으며 지은의 옆으로 다가왔다.

“글쎄, 박사님 연구실에서 풍겨오는 수상한 핑크빛 기운을 감지하고 있었지. 혹시 또 무슨 엉뚱한 상상으로 논문 주제를 정한 건 아니겠지?”

“제 연구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그리고 핑크빛 기운이라뇨? 말도 안 되는 소리!”

지은은 얼굴을 붉히며 빽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덜컥, 하는 불안감이 스쳤다. 혹시 민준도 편지에 대해 눈치챈 걸까? 아니면… 혹시 편지의 주인공이 민준과 관련 있는 건 아닐까?

“아무튼, 수고하십니다.”

민준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며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갔다. 지은은 그 뒷모습을 쏘아보며 찜찜함을 감출 수 없었다. 민준은 늘 이런 식이었다. 겉으로는 지은의 연구를 비웃거나 방해하는 듯 보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묘하게 도움을 주는 듯한 행동을 하곤 했다. 이번에도 그럴까? 아니면 정말로 자신의 비밀을 눈치챈 걸까?

그날 이후, 지은의 연구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편지의 흔적을 쫓으려면 고대 문헌을 샅샅이 뒤져야 했는데, 민준이 나타날 때마다 연구에 차질이 생겼다. 예를 들어, 지은이 고대 서신을 분석하기 위해 현미경으로 꼼꼼히 살피고 있을 때면, 민준이 ‘기계 점검’을 핑계로 와서는 덜컥, 하고 현미경 전원을 꺼버리는 식이었다.

“아니, 박사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아, 죄송합니다. 이게 자꾸 오작동을 해서요. 하하.”

민준은 능글맞게 웃으며 지은의 뒤통수를 쳤다. 지은은 이를 갈았지만, 민준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묘한 전류가 흐르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의 짓궂은 장난 뒤에 숨겨진 진심은 무엇일까.

어느 날, 지은은 편지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푸른 달의 숲’이라는 지명을 발견했다. 고대 지도에서도 찾기 힘든 이름이었다. 지은은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그때, 민준이 샌드위치를 들고 지은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또 굶고 있었군. 이거 먹고 힘내.”

“됐어요. 박사님 간섭은 사양입니다.”

지은은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민준은 피식 웃으며 샌드위치를 지은의 책상 위에 놓았다.

“푸른 달의 숲 말인가? 그거, 아마 ‘월영산(月影山)’을 말하는 걸 거야. 옛날 기록에 보면, 달이 뜨면 산 전체가 푸른빛으로 물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

지은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월영산이라니! 어떻게 그걸 알았을까?

“어떻게… 그걸…?”

“나도 예전에 우연히 관련 기록을 본 적이 있어서. 박사님처럼 꼼꼼하게 뒤지지는 않지만, 흥미로운 건 그냥 지나치질 못하거든.”

민준은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의 말에 지은은 의심 반, 감사 반의 표정으로 민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왜 저한테 알려주시는 건데요? 일부러 방해하는 척하면서.”

“방해?”

민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박사님 연구가 워낙 흥미로워서 말이지. 혹시라도 중요한 걸 놓치면 아까우니까. 내가 좀… 도와주는 거지. 나만의 방식으로.”

그의 눈빛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지은은 그의 말에 묘한 설렘을 느꼈다. 민준은 겉으로는 깐족대고 방해하는 듯 보였지만, 사실은 자신의 연구를 돕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방식대로.

함께 월영산의 옛 기록을 파헤치던 밤은 깊어갔다. 낡은 문서들 속에서 ‘푸른 달의 숲’에 대한 단서들을 하나씩 찾아나갔다. 때로는 민준의 날카로운 통찰력이, 때로는 지은의 끈질긴 집념이 빛을 발했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모르는 것을 묻고 답하며 둘 사이에는 묘한 유대감이 형성되었다.

“이 구절 좀 봐, 지은아.”

민준이 낡은 양피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대와의 시간은 푸른 달빛처럼 영원히 머물기를…’ 이건… 정말 낭만적이잖아?”

그의 목소리에 묘한 떨림이 느껴졌다. 지은은 민준의 옆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평소의 능글맞은 표정 대신, 진지하고 애틋한 표정이었다.

“그러게요… 얼마나 사랑했으면 이런 말을 썼을까요?”

지은의 목소리도 저절로 나긋나긋해졌다. 민준은 지은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어쩌면… 그 사랑이 아직도 우리 곁에 머물고 있을지도 몰라.”

그의 말에 지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의 말은 편지의 주인공에 대한 것일까, 아니면…

시간이 흐를수록, 지은은 민준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다. 그의 짓궂은 장난 뒤에 숨겨진 다정함, 겉으로는 차가워 보이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그에게 점차 끌리고 있음을 느꼈다. 물론, 아직도 ‘편지의 주인공’이라는 환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어느 날, 지은은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발견했다. “나의 진정한 별, 나의 유일한 달이여, 이제 모든 비밀을 덮고,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리라.”

“새로운 시작이라니… 이게 무슨 뜻일까요?”

지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민준은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턱으로 책상 위를 가리켰다.

“저기, 박사님… 저 파편 좀 보세요.”

지은이 고개를 돌리자, 민준이 말한 파편에는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마치 긁어내듯 희미하게 새겨진 글씨. 지은은 조심스럽게 돋보기를 가져다 댔다.

‘…그림자 연인, K에게.’

‘K?’

지은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K라니? 편지를 쓴 사람이 ‘K’라고? 그렇다면…

“박사님, 설마… 편지를 쓴 사람이 K라는 건가요?”

지은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민준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놀랐지? 나도 처음엔 믿기지 않았어. 하지만 이 필체, 이 표현 방식… 모두 ‘그림자 연인’이라고 불렸던, 우리 역사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익명의 시인과 일치해.”

‘그림자 연인’이라니? 그런 인물이 있었던가? 지은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이상형이라고 믿었던 인물은 ‘그림자 연인’이라는 익명의 시인이었고, 그 이름이 ‘K’였다니.

“그럼… 그럼 편지에 적힌 ‘나의 별, 나의 달’은…?”

“그건… 아마… 편지를 받은 사람을 의미하는 거겠지.”

민준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눈빛이 복잡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 편지를 쓴 ‘그림자 연인’ K는… 바로 나야.”

순간, 연구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지은은 민준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박사님… 거짓말이죠?”

“거짓말이라면 좋겠지.”

민준은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쓴 편지야. 아주 오래전에… 잊고 싶었던, 하지만 잊을 수 없는 사랑을 담은 편지.”

지은은 충격에 휩싸였다. 자신의 이상형이라고 생각했던 ‘그림자 연인’의 편지. 그는 그 편지의 주인공이 바로 민준이었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그토록 상상했던 로맨스는…

“그럼… 저는…?”

“박사님은… 나의 별, 나의 달이었지. 아주 오래전부터.”

민준은 지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의 손은 따뜻했고, 떨리고 있었다.

“처음 박사님을 봤을 때부터 알아봤어. 그 편지의 주인공이 박사님일 거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박사님은 너무 이상주의자였어. 현실과는 동떨어진, 꿈속의 사랑만을 좇는 사람. 그래서… 그래서 일부러 방해하는 척했던 거야. 박사님이 진정한 사랑을 놓치지 않도록, 그리고… 내가 너무 앞서나가지 않도록.”

지은은 눈물이 핑 돌았다. 민준의 모든 행동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짓궂은 장난, 얄미운 방해, 그리고… 묘한 끌림. 그것은 모두 그가 자신을 향한 마음을 숨기기 위한, 혹은 자신을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한 복잡한 연애 작전이었던 것이다.

“그림자 연인… K… 박사님이었군요…”

지은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민준은 지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그래. 이제… 모든 비밀이 밝혀졌어. 박사님은 더 이상 꿈속의 사랑을 좇지 않아도 돼. 바로 여기에, 현실에… 당신의 별, 당신의 달이 있어.”

지은은 민준의 진심 어린 눈빛을 마주했다. 더 이상 편지의 주인공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이상형은 이미 그녀의 곁에 있었다. 겉으로는 얄미웠지만, 늘 그녀를 지지하고 이끌어주었던, 바로 이 남자, 미스터리박사 K, 강민준이었다.

그때, 민준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있잖아, 지은아. 사실… 이 편지, 나 혼자 쓴 건 아니야.”

“네? 그게 무슨…”

지은이 의아해하는 순간, 민준은 낡은 양피지 한 장을 더 꺼내 보였다. 그 위에는 익숙한 필체로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나의 소중한 K, 그리고 나의 빛나는 별 J에게. 두 사람의 만남 또한, 이 숲처럼 영원히 푸르기를.’

지은은 숨을 멈췄다. ‘J’라는 이름. 그것은 바로 자신의 이름이었다. 편지를 쓴 ‘그림자 연인’ K는, 자신과 민준, 두 사람 모두에게 영향을 준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만남 자체가,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된 운명이었음을 암시했다.

지은은 민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수많은 시간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그는 언제나 지은을 기다려왔던 것이다.

“박사님… 아니, 민준 씨.”

지은은 수줍게 웃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민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지은아.”

그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낡은 편지는 이제 과거의 비밀이 아니라, 두 사람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징표가 되었다. 푸른 달빛처럼 영원히 머물 사랑이, 이제 막 그들의 곁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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